허성우 사)국가디자인연구소 이사장
허성우 사)국가디자인연구소 이사장

“우리는 미국을 더 이상 적(敵)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이 한마디로 반세기 동안 전 인류를 짓눌러온 냉전구도의 양상은 달라졌다. 반면 “우리는 더 이상 한국을 우방국으로 보지 않는다.”는 일본 아베 총리의 이 한마디로 동아시아 자본주의를 떠받쳐온 중심축인 한·일 관계가 급속히 냉각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며 초강경 대일(對日) 메시지로 맞받아쳤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복수법으로 대응했다. 한·일 양국 정상들의 언어만 보면 흡사 총탄이 난무하는 전시(戰時)상황 같다. 국민의 반일감정은 100년 전 3.1운동 이후 최고조에 이르러, 함께 싸우지 않으면 매국노 혹은 친일파로 낙인찍는 분열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사실 한·일 양국은 1965년 한일협정 후 경제·안보 등을 중심으로 협력해 왔으나 사소한 부주의로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스탱크처럼 만성적 불안을 품은 채 지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35년간 일제 식민 지배의 역사가 한일관계의 원심력(遠心力)으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대를 원수 보듯 하지만 일본만큼 인종이나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와 닮아 있는 나라도 드문 것이 사실이다. 저명한 문명사 재레드 다이몬드(Jared Diamond)는 “한·일 양국은 핏줄로 이어져 있는 ‘쌍둥이 형제’이며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그들의 오랜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 승자 없는 제로섬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현재의 한·일 양국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근본적 이유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의 경제보복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에 대한 판결로부터 시작됐지만 일본의 동북아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전격 회동하는 등 한반도 해빙이 급류를 타고 있을 때 재팬패싱(japan passing)을 경험한 일본은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실리외교로 유명한 일본이 이렇게 무리한 경제 보복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논리적으로 계획해 온 전략임이 틀림없다. 그러면 일본이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해 치고 들어오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우리 정부는 북한에 올인 하면서 일본의 외교적 전략 변화를 전혀 감지해 내지 못했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한반도에 봄이 온 냥 들떠 4강(强) 중 하나인 이웃 일본을 방치해 온 것이 화근(禍根)이 되고 말았다.

한반도 분단이라는 지리정치학적 조건과 부존자원이 빈약해 대외 무역의존도가 70%에 달하는 지리경제학적 현실로 인해 우리나라는 외교의 중요성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크다. 한국인에 있어 외교의 중요성은 뼈에 새겨지고 피에 녹아 있어야 된다는 것이 대한민국 생존을 위한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가 살길인 나라에 능력 있는 외교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다. 외교부 장관, 대외공관장 등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이 필요한 자리에 단순히 화제성이 있거나 대선 선거 캠프 출신 보은인사를 임명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白戰不殆)의 진리는 외교전에서 더욱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한·일 경제보복의 외교실무 대표인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아베 정부의 대표적인 지한(知韓)파다. 반면에 우리 외교 실무진 중 일본을 제대로 알고 상대할 수 있는 외교전문가가 있는지, 특히 일본의 외교를 책임지고 있는 고노 다로 외무상을 상대할 외교전문가가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차제에 외교정세에 민첩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외교장관, 각국 주재 대사, 청와대로 연결되는 외교 3각 편대(編隊)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적나라하게 노정된 우리 외교의 한계를 인정하고 냉철한 현실인식과 외교적 전문성을 갖춘 외교안보팀을 새롭게 꾸려야 한다. 현재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외교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막후정치를 이해하고 일본 조야(朝野)에 인적 네트워크를 전방위로 동원할 수 있는 전문가들로 꾸려진 외교팀이 구성되어야만 일본 역시 협상에 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일간 강대강 대응은 양국 모두에게 커다란 국익손실이며, 이는 결국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에만 이득을 쥐어 준다는 점을 일본에게 설득하고, 이번 기회에 경제와 역사 등 모든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일괄타결 협상을 제안을 하자. 전쟁의 승패 핵심은 냉철함이 기본이다. 차분하게 상황을 만들어가는 일본을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대응으로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지 ‘통곡의 벽’ 입구에는 새겨진 이스라엘의 민족정신인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글귀를 곱씹으면서 일본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우리 모두가 함께 찾자.

'각자의 자리로' 연합
'각자의 자리로'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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