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포항은 최근 관광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획기적이고도 포항만의 독창성을 갖춘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제조업체들도 시대를 뛰어넘는 혁신의 아이콘들을 마구 내어놓지는 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사고와 감성이 수용 가능한 조직문화와 더불어 기술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그러한 혁신기반과 역량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짝퉁은 짝퉁일 뿐이다. 따라서 포항만의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게 모든 분야에 걸쳐 지역이 지닌 독창적인 자원 발굴에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패션분야에도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들이 있다. 겉보기에는 비슷하게 보여도 원단부터 재봉과 마무리를 거친 착용상태의 의복에는 절로 눈길이 모인다. 패션업계에서는 지갑 사정이 좋지 않은 청년층을 대상으로 박리다매용 양산품은 ‘화이트라벨’로, 이들과는 달리 생산 수량을 한정시키고 고급화와 희소성까지 갖추면서 때에 따라서는 구매고객들까지 제한하는 별격의 작품군은 ‘블랙라벨’로 관리한다. 고품격과 최상류층을 상징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이 블랙라벨을 동화시킨 것이다.

포항도 이 블랙라벨급의 문화적 유산이 적지 않다. 굳이 해외나 여타지역에 눈을 두며 다른 지자체들처럼 짝퉁의 양산에 힘쓸 필요는 없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스토리텔링을 지닌 포항만의 문화유산의 명품 가운데 블랙라벨급만 내세워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검은 갈매기(黑鷗)’를 호로 사용하였던 ‘흑구 한세광(韓世光)’선생이다. 1909년 대한제국 국민으로 평양에서 태어난 한세광 선생은 암흑기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1929년 도미를 단행하였다. 미국행 선박에서 바라본 망망대해에서 갈 곳을 찾아 헤매는 한 마리 검은 갈매기에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순간 흑구가 태어났다.

1934년 모친이 위독하여 급거 귀향한 후 전영택과 종합지 태평양을 창간하고 문예지 백광을 창간 주재하기도 하였다. 한흑구 선생은 1939년에는 흥사단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광복 때까지 유일하게 친일의 점 하나 찍지 않았던 12인의 민족문학인 중 한사람이다. 광복을 맞이한 해 월남하였던 선생이 포항으로 이주한 것은 포항이 시로 승격하기 1년 전인 1948년이었다.

한흑구 선생은 원주민으로 ‘포항시민’의 자격을 취득한 셈이다. 1958년부터는 지금의 포항대학 전신인 포항수산초급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다 1979년 70세로 작고하기까지 왕성한 문학 활동으로 제2의 고향인 포항에 수필문학의 씨를 뿌리고 문학 세계의 빛(世光)이 되었다.

한흑구 선생은 미국의 문학을 한국에 번역 소개한 한·미 간 문학교류의 전도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포항의 문인이었지만 ‘전국구’를 넘어 한국과 미국을 발판으로 하였던 ‘국제구’였다. 인문학의 기반은 문학이며 문학의 감성은 뜨거운 심장에서 나온다. ‘검은 갈매기’는 포항 인문학의 심장이었던 것이다.

포항은 지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이트라벨’을 양산할 필요가 없다. ‘블랙라벨’인 ‘흑구’가 있기 때문이다. 평양의 검은 갈매기가 서울을 거쳐 포항에 안착한 지도 포항시 승격 70주년과 거의 맞물린다. 이번 기회에 포항인문학의 상징이자 심장인 ‘한흑구 문학관’이 멋지게 건립되었으면 한다. 어쩌며 뜨거운 가슴과 감성을 지닌 전국의 문인들이 ‘검은 갈매기’와 함께 머물며 토론하고 교류하는 순간 포항 인문학의 심장이, 점차 공동화되고 있는 포항시의 ‘옛심장(舊都心)’을 다시 뛰게 만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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