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무 수필가·김천시가메실경로당 회장
류성무 수필가·김천시가메실경로당 회장

 

선조의 산소(山所)에 벌초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평소에 그리워하고 고향정서를 잠시나마 발에서부터 온몸으로 함뿍 느끼고 싶어서 소년기의 농로였던 오솔길을 들어서니 풀이 허리까지 차올라서 길을 막았다.

손으로 풀을 헤치면서 언덕 오솔길을 더듬거리면서 먼 산과 길 아래 들과 옆을 내려다보는 순간! 이 비탈진 언덕바지에서 70년 전에 할머니께서 흰머리에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열어놓은 목화대에 목화을 바르는 장면이 선명하게 상기(想記)되었다.

목화 바르는 길 아래 좁은 농로에는 문득 아버지께서 소에다 재를 싣고 다니셨고, 어머니는 길 건너 콩밭에서 콩잎을 따고 있는 영상들이 이어졌다.

필자가 청소년기에 살았던 산촌 고향은 비산비야의 상주시 중동면 간사리 중방동으로 버스가 다니지 못하는 오지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양쪽에는 산이 둘러있고 이마에 와 닿는듯한 앞산은 벌거숭이로 비가 오면 산사태가 날 지경이었다.

앞산 바로 밑에는 소위 거렁(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마을 뒤에는 뒷머리에 와 닿는듯한 “갈밭골”이라 산을 지고 살았다.

수원이 나빠서 한발이 들면 옹달샘에 식수마저 말라서 앞산 거렁물을 이고 지고 날라다 먹었다.

경지는 수리안전답은 적었고 천수답이기에 밭농사가 많았고 여름 가뭄에는 기존 웅덩이에서 물을 퍼서 벼가 겨우 자랄 정도로 물을 퍼주었다.

이러한 열악한 여건에서 농업소득이 너무나 저조하여 매년 식량난을 면치 못하여 봄이되면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이웃 마을에 가서 장리곡(고리체벼)을 먹고 가을에 장리곡을 변제하려면 탈곡한 벼를 뒤주에 갈무리할 겨를도 없이 주고 나면 이듬해 봄에 또 장리곡을 먹어야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꼴이 되었다.

이런 빈촌에서 아버지께서는 봄이면 보리 논밭에 거름을 주거나 흙 넣기와 보리밟기(토입담앞)를 하셨고 벼농사의 모자리 설치를 하기 위하여 버드나무가지를 잘라서 모판을 만들었고 빈농의 대명사인 소위 춘궁기에는 허기진 몸으로 노동에 여념없는 몸가짐은 봄빛에 검게 탄 야윈 얼굴에 종아리는 물떼에 찌들어서 목불인견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건너들 “멍어베미”라는 논에서 흙 묻은 치마를 걷어 올려 새끼로 허리에 매고 부인들과 함께 줄지어 모심는 모습!

여름 뙤약볕 건너 서숙 밭에서 씨 고르고 풀을 뽑으면서 더우면 피마자 잎으로 부채삼아 부치고 밭가에 준비해 둔 배추와 된장으로 꽁보리밥을 잡수시면서 농사일만 하셨다.

검정굴(들이름)은 한적한 골짜기인데 전부가 밭이지만 반은 논을 떠서 천수답이었다. 가뭄이 계속되다가 늦비가 오면 온 식구가 밤잠을 자지 않고 계곡을 막아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몰아 넣어서 급히 모심기를 한다.

비가 늦게라도 오지 않을 때는 부득이 메밀이나 서숙을 파종한다. 물을 같이 막다가 동생과 물장난을 쳐서 울린적도 생각나는데 지금 그 동생은 나이 80이다.

“골이”라는 들은 밭만 800여 평인데 뽕나무 심은 사이로 목화와 수수, 서숙을 심어서 어머니께서는 혼자서 삼복더위에 밭메느라고 얼굴에는 땀띠로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면서 밭에서 살다 싶이한 그 모습들이 어릴 적보다도 그 광경은 지금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진다.

“뒷골”이라는 들은 굽논(수리안전답)으로 부자 집들만 가지는 수리안전답이 있었으나 필자의 대학 학비 조달로 팔았다.

아버지께서는 저녁 식사를 하시고 밤늦도록 농사용 새끼를 꼬고 돌아오시면 배가 출출하여 밤참을 잡수시려고 덮어둔 국수 그릇을 여는 순간 쥐가 소스라쳐 달아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셨다. 6.25사변 이후 1950년대의 농촌 생활이란 굶주림의 생존에 쥐가 지나간 국수도 먹고 살아야했던 궁색했던 단면이 지금 생각하게 되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와 닿는다.

여름철 농한기에는 풀을 베서 잿간에 쌓고 소가 밟아서 썩게하여 가을 보리를 파종할 재를 만들기 위하여 몇 번이고 뒤집어서 보리 갈 논에 운반한다. 그런데 재를 뒤집는 날은 시원할 적에 한다고 이른 새벽부터 빨리 일어나서 가래 줄을 당기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성화는 왜 그리 귀찮고 일어나기 싫었던지..철이 없어서..

어릴 적에 곁에서 본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을밤에 새끼를 꼬시고 짚으로 농구를 만드시다가 배가 고프시면 어두운 밤에 감나무 밑에 가시어 더듬어 만져지는 생감을 따가지고 잡수시는 소리를 내가 잠경에 들은 생각, 목화를 재배하여 배를 짜서 40리길 “의성 안계장”을 가시기 위해 새벽에 출발하여 다녀오시려면 역시 밤이다. 추운 겨울이면 양말이 얼어붙은 신을 벗어 떨면서 마루에 걸터앉아 피로에 지친 모습.

내가 하는 일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풀을 베야하고 오후에는 매일같이 소 먹이느라 들과 산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있었다.

어머니께서 농사일 외에 집안일로 점심을 하고 소죽을 끓여야 하고 점심밥을 들에 내어가야 하는 등 하루 하는 일을 시간으로 계산하면 13~16시간이고 임금으로는 300만 원이라고 하면 주부들의 월급은 300만 원이라고 본다.

이러한 빈촌의 생활고에 필자는 12세에(국교4년) 해방이 되었고 상주농잠중학교 2학년 시 17세에 6.25동란이 발발하여 학교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바람에 나무 그늘 밑이나 다리 밑에서 수업을 했다.

이어서 상주 농잠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을 하면서 부산동아대학에 입학하게 3학년 재학 중에 학보병(學保兵)에 지원 입대하여 1년 6개월 군복무를 마치 고 복학하였다.

대학 4학년말에 1960년 12월 경남농림국장 소개로 경남 하동군 잠업기술촉탁으로 배명 받아 근무했는데 1961년 3월 11일에 있은 동아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평생 한으로 되새김하고 있다. 이유는 신임이라 휴가를 낼 엄두도 내지 못할 사정이었다.

하동군에서 근무 중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나던 해에 농림부 지역사회국에서 모집하는 C·D(지역사회개발지도원)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 건국대학교에서 4개월의 학과교육과 2개월의 실습교육을 이수하고 1961년 12월 5일 경북 봉화군 해저마을에 C·D요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1962년 4월 당시 농림부 농사교도소와 C·D와의 통합에 의하여 봉화군 농촌지도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농촌지도사(지금 6급) 계장직에서 총무처 특별승진시험에 기술담당(5급)으로 합격하여 안동군 농촌지도소와 금릉군 농촌지도소를 거처 김천시 농촌지도소장으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1989년 1월 1일자 상주군 농촌지도소장(4급승진)을 배명 받아 고향농촌지도사업 발전과 고소득 농업을 성공리에 이룩하고 통산 35년간의 공직을 마치고 1995년 6월 30일 퇴임을 하고 김천에 아울러 24년이 지난 2018년 9월에 선조 산소 벌초길에 엮은 망향의 시름과 고향은 만년 고향, 타향은 만년 타향이라는 생각을 새삼 느끼면서 농로였던 잡초가 우거진 오솔길에 허리까지 덮인 풀을 헤쳐가면서 보이는 산야는 그대로이나 다만 들에는 경지정리가 돼 있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농로가 개설되어 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풀만 우거져 패쇄 된 비탈길에서 70년 전에 들녘에서 농사일에 골몰하시던 부모님의 그 영상이 떠올라서 하염없이 글을 쓴다.

당시 빈농의 실태는 생활이 아니라 생존을 위하여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다가 보리가 나오면 식량을 이어가는 그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하는 것이 이 보릿고개라는 슬픈 명칭은 지금 이 시대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는 우리나라 농업청사에 길이 남을 명칭이라 하겠다.

굶주림에서 몸에 병이 들면 병원에는 아예 가지 못했고 민물만 먹다가 그것마저 넘어가지 않으면 돌아가시므로 그 시대는 회갑을 지내는 노인이 드물었다.

그 시대의 농민들은 자식 공부시켜가면서 일제강점기와 6.25사변을 겪었고 가난의 죄인처럼 살면서 국가재건에 희생정신으로 헌신한 공과는 대접을 못 받고 살아온 선조(先祖)를 회상하면 울분과 분통이 터지고 망향의 애한(哀恨)과 회한(悔恨)의 불우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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