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반발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 등 ‘NO 재팬’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는 가운데 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의 성지’안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미포상 독립운동가를 포함해 1000여 명이 넘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기도 한 안동은 한국독립운동사를 그대로 품으면서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다.

안동이 한국독립운동사의 첫머리를 연 것은 1894년 일어난 갑오의병 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 핵심 인물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단체의 창립지와 활동지, 의거지를 모두 아우르면서 독립의 기상과 찬란했던 시간이 지금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로 잘 알려진 임청각(보물 제182호)를 비롯해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극렬한 저항으로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향산고택,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사람만 20여 명이 넘는 내앞마을 등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독립의 혼이 남아 있는 역사적 명소를 소개한다.
 

원래 99칸의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독립운동가 배출이 많다는 이유로 일제가 마당을 관통시켜 철로를 놓았다.절반으로 잘려 나간 임청각의 앞마당으로 기차가 달리고 있다. 안동시.

△ 일제의 만행으로 허리가 잘린 임청각.

2009년 현충 시설로 지정된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로 현재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일제의 만행으로 99칸의 가옥이 절반으로 잘려나간 임청각은 지금까지 11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해 3대가 독립 투쟁에 나선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임청각 안 군자정에는 퇴계 이황이 쓴 현판과 함께 독립유공자 증서가 빼곡하다. 가진 재산을 종잣돈으로 의병항쟁을 지원하고 온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과 그의 가족이 걸어온 험난했던 독립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곳이 임청각이다.

특히 임청각에서는 숙박이 가능하며 다양한 체험도 할 수 있으며, 임청각 뒷길인 소담길에는 우리나라 토종 무궁화가 만개해 있다.
 

이만도 의병장이 살았던 향산고택. 안동시

△ ‘목숨을 끊어 나라를 따르다’ 이만도의 향산고택.

향산고택은 의병장이자 자정 순국한 이만도가 살았던 집이다.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극렬한 저항이 곧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정 순국이었다. 향산고택 또한 대를 이은 독립운동의 집안이다.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아들 이중업과 며느리 김락 또한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며느리 김락은 서산 김흥락의 누이로 독립 만세 운동에 나섰다가 고문으로 두 눈을 잃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락의 언니인 김우락 여사가 석주 이상룡의 부인이다. 당시 문중끼리 거듭되었던 통혼으로 서로 강하게 연결된 안동 독립운동이 집단성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락의 아들 이동흠 또한 대한광복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원래 도산면 토계리에 있던 향산고택은 안동댐 건설로 현재의 자리인 안막동으로 옮겨져 있으며 임청각과 같이 숙박 체험이 가능하다.
 

안동 내앞마을 백하구려. 만주 항일투쟁을 이끈 백하 김대락의 집으로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내앞마을과 경북독립운동기념관.

내앞 마을 사람들이 독립운동은 1894년 의병항쟁으로 시작돼 광복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었다. 이 마을에서 독립 유공자로 포상된 사람만 20여 명이 넘는다. 천전(川前)의 한글 이름인 내앞은 구국을 위한 인재를 길러낼 새로운 길을 열었던 협동학교의 설립지다. 협동학교의 시작이었던 가산서당은 현재 복원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협동학교 교사로 쓰였던 백하구려는 만주 항일투쟁을 이끈 백하 김대락의 집으로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또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동 김동삼의 생가도 볼 수 있다.

내앞 마을의 입구에는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의 철재관 발견 당시.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철재관을 열지 못하도록 용접된 채 발견됐다.안동시

기념관에는 독립운동가 막난 권오설 선생의 철재관도 전시돼 있는데 이는 2008년 선생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철재관을 열지 못하도록 용접 된 채로 발견돼 당시 유족과 주민들이 울분을 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 옥사한 권오설 선생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라는 이유로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감방체험을 비롯한 페인트볼 서바이벌과 사격 등 독립군의 훈련과정과 전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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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목 기자
이정목 기자 mok@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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