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앞에서도 할 말은 하던 꼬장꼬장한 선비정신 유유히

임천서원
임천서원(臨川書院)은 안동시 송현동 호암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이다. 2010년 3월 1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됐다. 조선 선조 때 문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단향으로 모신 안동 내의 유일한 서원이다.
임천서원 현판
김성일은 1593년(선조 26) 4월 29일 진주공관에서 수명을 다했다. 14년 뒤인 선조 40년(1607)에 선생의 학덕과 공훈을 기려 일향의 선비들이 선생의 상자지향(桑梓之鄕)에 조두지소(俎豆之所)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 따라 당시 안동부사로 와 있던 한강 정구가 임하현 서쪽 옛 서당에다 사묘를 세우고 향사했다.
임천서원 강당
1618년(광해군 10)에 ‘임천’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당시 영남유림들이 훼철 반대를 상소하였다가 이문직, 유기호 등 14명이 귀양 가게 됐다. 그 뒤 1908년에 복원됐다.
임천서원 서재
임천서원 입도문 현판
경내에는 묘우를 비롯하여 동서재, 강당, 전사청, 주사 등의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 중 묘당은 동향으로, 강당은 남향으로 건립되었는데 이는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을 배치하였기에 일정한 방향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학봉 김성일(오른쪽)
△학봉 김성일

학봉은 청계 김진(1500∼1580)의 5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다섯 형제가 모두 생원시 이상을 통과했고 셋은 대과(지금의 고시) 를 급제했다. 청계 김진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하여 이 집안을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 일컫는다. 김진의 종택은 안동 내앞마을에 학봉종택은 서후면 금계리에 있다.

학봉은 19세 되던 해 퇴계의 문하에 입교하여 1569년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4형제와 함께 수학했다. 특히 퇴계는 학봉에게 요순 이래 유학의 연원과 도통의 정맥에 대해 손수 써서 만든 병풍을 선물했을 정도로 남다른 지원과 사랑을 보였다.

학봉은 1568년(31세)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사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의 벼슬길은 한 마디로 순탄했다. 그는 정6품인 병조좌랑(36세), 정5품인 병조정랑(38세)을 역임하고, 39세에는 이조좌랑을, 40세에는 이조정랑을 역임했다. 이 시절 학봉은 한 마디로 바른말 잘하는 강직한 신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별명은 임금 앞에 호랑이라는 뜻의 전상호(殿上虎)였다.

49세에 고향으로 돌아 온 학봉은 50세 되던 해, 석문정사를 짓고 외부와의 거리를 둔 채 스승 퇴계의 문집을 출간하고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오로지 학문과 육영에 전념했다. 그러나 당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정국은 다시 그를 조정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종부시정으로 승진한 학봉은 곧 봉상시정으로 직책을 옮긴 후, 다음 해에 국빈을 접대하는 예빈시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해 12월에 일본통신사의 부사가 되어 일본을 다녀온 뒤, 임란을 맞아 경상우도 관찰사로 56세에 진주공관에서 순직하기까지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학봉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한 것을 두고 징비록에는 이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학봉은 왜적들이 끝까지 동병(動兵)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으나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고 당황할까 걱정되어 그것을 해명했다는 것이다. 학봉은 가뜩이나 불안한 정국에 민심이 무너지면 능히 적을 방어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그 같은 주장을 했을 것이다. 이 같은 학봉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가 주자학적 세계관에 충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천서원 사당인 숭정사와 주사.
△400년 이어온 학봉 고택의 구국활동.

안동시 서후면 검제 마을 한가운데에 ‘학봉선생고택’이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본류인 퇴계학의 연원 정맥을 근세에까지 이어온 근세 정신문화 중심지의 하나였고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400년 줄기차게 이어온 항일 구국 활동의 산실이었다. 이 고택의 주인공인 학봉 김성일과 선생의 장손인 단곡 김시추, 선생의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 13대 종손인 김용환 지사 등 이 집안 내력이 전해오고 있다.

단곡 김시추는 광해군 13년 영남유림의 소추로 추대되어 오국의 원흉인 이이첨 일당의 죄과를 단죄하는‘영남유생만인소’를 3소까지 올렸으며 정묘호란시에는 안동의병대장으로, 병자호란 시에는 안동 유진장으로 활동했다.

김흥락은 전국 최초의 항일의병인 안동갑오의병을 일으켰으며 을미의병과 병신의병을 총지휘하여 안동부를 점령했다. 수천명의 후학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와 독립사상을 가르쳐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기암 이중업, 공산 송준필, 성제 권상익과 같은 걸출한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김용환 지사는 젊어서는 경북 지방의 무수한 의병 전장을 누볐고, 학봉종가 전 재산과 임천서원의 재산을 포함하여 20여만 평의 전답을 처분하여 종고종형인 만주의 석주 이상룡 서로군정서 총재에게 독립군 자금으로 헌납했다. 그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 중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9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등 네 번이나 구속되기도 했다. 이는 학봉으로부터 시작된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온 자랑스러운 이 집안 내력이다.



◇ 서원 연재를 마지며.

지난 2018년 경북일보 창간 28주년 특집으로 ‘영남유학의 중심 도산서원’을 시작으로 경북·대구지역의 서원 시리즈가 시작됐다. 세계유산 등재 재추진을 계기로 한국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마침 지난 7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안동 도산병산, 영주 소수, 경주 옥산, 대구 달성 도동서원 등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됐다.

한국의 서원은 400여 년을 지속해 온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자산이자, 정신문화의 산실이다. 겸손과 절제를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자연과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며 학문연구를 통해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했던 곳이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잘 보존하지 않으면 ‘위험에 처한 유산’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심지어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유산은 등재와 동시에 보존이라는 과제를 떠안는다.

이제는 서원의 긍정적 가치를 되살려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때다. 서원에 대한 통합된 보존관리 방안과 활용방안 마련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53회 연재를 마치며 이제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약속한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