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 중인 경제전쟁 발발 원인이 양국 간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아니라고 우기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그들 말고는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지구 상 어디에도 없음이 분명하다. 그동안의 양국관계를 보더라도 비록 역사인식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국가안보에 위협될 만한 심각한 적대적 행위가 서로 간에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도 느닷없이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뜬금없는 이유로 경제전쟁을 일으킨 걸 보면서 일본의 진짜 속내가 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한국경제가 일본을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경제적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참에, 양국 간의 과거사 문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분명히 매듭짓겠다는 숨은 의도가 저변에 깔려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즉, 억지를 부려서라도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한국 측의 반성요구를 이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광복 이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간혹 과거 행위에 대한 두루뭉술한 사죄와 반성을 담은 담화가 나오긴 했지만 식민지배의 불법성만큼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지난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서 1910년 8월에 강제로 맺은 조약을 무효로 한다고 명시했지만 이 역시, 불법지배에 의한 무효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위한 이전 조약의 무효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 그들이다. 그러니 합법적 식민통치 과정에서 발생한 행위에 대한 피해보상은 몰라도 반인도적 불법 식민지배에 따른 배상책임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제공한 무상원조로 모든 피해 보상은 끝났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보상과 배상의 법률적 의미 구분이 행위에 대한 불법성 여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면 왜 일본이 그토록 배상문제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지 알 수가 있다. 지난 과거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책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1951년 한일기본조약의 근간이 되는 일본과 연합국 간에 맺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연합국에 대한 모든 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쓰여 진 한일기본조약과는 다르게 청구권 포기라는 문구가 명확히 들어간 조약이었다. 그러자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국민들은 자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국가가 임의대로 포기한 데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였다. 이에 일본 최고재판소는 국가가 포기한 것은 국가청구의 ‘외교적 보호권’이지 ‘개인적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기에 국가배상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한마디로 조약에 의해 국가가 나서 청구권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가해국가를 상대로 개인은 피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또한 2007년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을 상대로 낸 피해배상 소송에서 일본 법원은 개인의 청구권은 인정되지만 배상책임은 없다는 판결을 내린 적도 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해괴한 판결이지만 역시, 피해국가 국민의 개인적 청구권만큼은 인정한 꼴이 되었다. 결국, 자신들의 논리대로라면 일제 강점기하에서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국민을 위해 한국 정부가 나설 수는 없지만 피해 당사자인 국민은 가해국가 또는 기업을 상대로 얼마든지 개인적 피해보상 청구소송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한일기본조약으로 모든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논리적인가를 역설적으로 증명해 준 셈이다. 이렇듯 국가 간 맺은 조약을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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