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王道)란 탕탕평평한 것이어서 속일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지 않을 것을 억측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이 왜노를 거절하려는 이유는 필시 저들의 죄가 큰데, 성급하게 화해하게 되면 그들의 악을 징계하기는 고사하고 수모를 받는 후회만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일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한나라 시대 여러 제왕들이 흉노의 죄가 큰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과 신속하게 화친을 맺은 것은 백성의 안위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태종은 돌궐과 화친을 체결했고, 송나라 진종은 거란과 화의를 맺었습니다. 태종과 진종인들 저들을 경솔히 허락하면 악을 징계할 수 없고, 장차 배신을 당해 수모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전쟁을 막고 사직을 지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해서였습니다.”

명종 때 퇴계 이황이 왜와 교섭하는 문제에 대해 올린 상소다. 왜는 간사하여 늘 우리를 속여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분명히 우리를 기만할 것이라고 짐작, 화친을 거부하는 다른 신하들과 달리 퇴계는 교섭을 통해 화의를 받아들여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령 왜가 배신하여 육지에 다시 쳐들어오더라도 평소에 안보를 강화하고, 빈틈없이 대비한다면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퇴계는 지금부터 미리 속단하여 화친을 그르칠 필요가 없다고 봤다.

극단적이고 섣부른 예단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해 “미리 의심하지 말고, 지레 억측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이 담긴 퇴계의 상소는 받아들이지 않고 묵살됐다. 그 뒤 ‘을묘왜변’ 등 끊임없는 왜구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한일갈등이 대결 일색에서 대화 모색으로의 전환 기미를 보였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나아질 기미를 보이던 한일갈등이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로 다시 최악으로 치닫게 됐다.

친일이냐, 반일이냐 택일하라는 집권 여권의 갈라치기 프레임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반일감정을 선동, 애국자 코스프레가 총선 몰이에 덕이 될 런지 몰라도 나라와 국민은 골병든다. 국익을 멀리 내다본 퇴계의 외교 혜안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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