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고바우 영감이/ 고개를 넘다가/ 고개를 다쳐서/ 고약을 발랐더니/ 고대로 낫더라”라는 작자를 알 수 없는 노래가 전국에서 불려졌다. 곳곳에 ‘고바우 상회’니 ‘고바우 약국’이니 하는 ‘고바우’를 단 각종 상점들도 등장했다. 신문 연재 만화 ‘고바우 영감’의 인기와 영향이 이 정도였다.

‘고바우 영감’은 1955년부터 2000년까지 격동의 시대, 정치 권력을 비틀고 꼬집으며 풍자해 국민의 애환을 대변했다. ‘고바우 영감’을 그린 김성환 화백은 1955년 처음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1980년대 조선일보에 12년 간 연재하고 2000년 문화일보에서 45년 간의 연재를 마쳤다. ‘고바우’ 캐릭터는 1950년대 대구에서의 피난 생활 중 다락방에 숨어 살면서 습작한 200여 개의 캐릭터 중 하나로 탄생했다. 높을 ‘고’자를 쓰는 성씨에 ‘바우’라는 이름을 붙여 친근한 이웃 아저씨 같지만 강직한 성품을 지닌 주인공이다.

“4·19 땐 이기붕이 ‘고바우 때문에 나라가 망하니 잡아들여라’ 했고, 박통(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한 달이 멀다 하고 중앙정보부에 불려 다녔으며, 전두환 때는 이민 가라고 압력을 넣더라” 김 화백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안동 출신으로 ‘왈순아지매’를 그린 정운경 화백은 “독재정권 시절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네 가족은 무사하냐?’ 협박하는 괴한도 있었고, ‘국회의원 자리를 주겠다’ 회유 하기도 했다” 회고하기도 했다.

신문의 네 컷 만화는 권력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수단이었다. 독자들은 때론 직설적이고 때론 선문답 같은 네 컷 만화의 행간을 읽으면서 위안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정운경 화백의 딸은 “치약 짜내는 듯한 고통을 자식으로서 보기가 안타까웠다. 신문, 잡지, 책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읽고, 사람들도 만나고, 그래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윤전기 옆에 서 있기도 하고, 온갖 짓을 다 했습니다.”고 아버지의 창작 고통을 증언하기도 했다. 창이 없는 집 같은 신문에 창문 역할을 한 ‘네 컷 만화’의 주인공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고바우 영감’의 김성환 화백이 8일 별세했다. 신문에서 창이 하나 둘 닫히면서 우리 사회와 정치가 더욱 삭막해지고 있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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