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3대 황제 칼리굴라는 폭군의 대명사다. 로마제국 역사상 칼리굴라만큼 시민들의 환호와 사랑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황제는 없었다. 아무런 약점도 없고, 적도 없는 상태로 시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면서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환호와 사랑은 4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그를 ‘벼락스타’로 만든 ‘칼빠(칼리굴라 팬)’들의 사랑이 식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근위대장 카이레이와 모반자들에 의해 30번이나 칼에 찔려 처참하게 최후를 마감했다.

로마 제국을 세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명문가 출신 칼리굴라의 본명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리쿠스다. 로마군 총사령관인 아버지를 따라 군대를 따라 다닌 어린 카이사르는 병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병사들은 군화를 만들어 신겨주면서 ‘작은 로마군화’란 뜻의 칼리굴라로 불렀다. 77세로 승하한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25세 절은 나이로 황제에 오른 칼리굴라는 시민들의 열열한 환영과 사랑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는 “티베리우스와 정반대의 정치를 하겠다”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로마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1% 매상세를 없애겠다”, “그동안 금지됐던 검투사 시합과 전차경주를 부활시키겠다” 등 포퓰리즘 정책에 시민들은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하나같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정책이었지만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선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날마다 검투사 경기와 전차경주도 벌여 시민들을 들뜨게 했다. 목욕을 좋아하는 시민을 위해 둘레가 1.6㎞나 되고 1600명이 목욕할 수 있는 초대형 대중목욕탕을 지어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즉위 7개월 만에 고열로 쓰러져 병상에서 회복되자 칼리굴라는 완전히 딴사람이 됐다. 잠복 돼 있던 폭군의 본성이 폭발했다. 폭압 정치가 이어지면서 정치보다 더욱 잔인한 고문과 형벌을 고안하는데 몰두했다. 칼리굴라 정치는 모두 돈을 퍼붓는 정치로 국고가 바닥나 재정이 파탄났다. ‘땔감세’ 신설 등 증세로 민심을 잃은 칼리굴라는 결국 자신의 경호대장 손에 암살되고 말았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강행한 ‘독선정치’에 시사점이 많은 칼리굴라 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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