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분자분 새김질로 저녁이 또 길어진다
과부하가 걸린 듯이 지레 붉은 단풍 사이
밀쳐 둔 신간들 앞에 생이 자꾸 더부룩하다
새김질은 어쩌면 슬픔을 수선하는 일
뭉텅 삼켰거나 훌쩍 들이켰거나
파지 속 붉은 신음을 씹다 젓다 별도 찾듯
신트림들 되새기며 점점 길게 저물려니
매일 홀로 넘어도 석양 저리 장엄하듯
시라는 지극한 울음을 비장처럼 길렀으니


<감상> 가을저녁은 순한 소처럼 오래 되새김질로 밤을 길게 늘여 놓지요. 가지 끝에서, 산정에서 먼저 나뭇잎을 붉게 물들이고, 붉은 신음 속에서도 희망의 별도 보게 하지요. 가을저녁이란 짐승은 왜 새김질을 계속 하는 걸까요. 어쩌면 슬픔을 덜어내는 일일 테고, 밀린 일 때문에 생이 자꾸 더부룩해서 그럴 테고, 생각이 많아 긴 밤이 필요해서 그럴 테죠. 자연은 빈틈없이 촘촘하게 돌아가는데, 우리네 인생은 엉성하므로 지극한 울음을 비장(悲壯, 혹은 秘藏)처럼 기를 수밖에 없네요.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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