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소설을 읽다 보면 시점(視點, point of view)의 중요성을 절로 알게 됩니다. 모든 이야기는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집니다. 동일한 팩트(facts), 동일한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화자(話者)가 어떤 시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표현과 내용이 180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해방과 6.25에 이르는 민족적 비극을 다루는 역사소설을 쓰고 싶은 작가가 있습니다. 지리산 일대를 배경으로 벌어진 이념 갈등을 특히 생생하게 그려내고 싶습니다. 그럴 때 그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시점을 먼저 정해야 합니다. 토벌대의 시점에서 쓸 것인지 빨치산의 입장에서 쓸 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합니다. 이야기 순서나 인물의 비중 같은 것은 그다음입니다. 혹시 객관적으로 양쪽을 다 살필 수 있는 중간자적 시점을 취할 수는 없는지 궁금해하실 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방법이 가장 좋을 것도 같습니다. 사람살이라는 게 복(福)이 있으면 화(禍)도 있고 행이 있으면 불행도 있는 법,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딱 중간에 서서 이쪽저쪽 다 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소설의 시점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말은 오로지 한 쪽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거나 “그가 열린 문으로 나왔다.”거나, 둘 중의 하나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소설 문법은 “그가 문을 열고 나가기도 했고 열린 문으로 나오기도 했다.”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시점과 화법의 불일치’로 간주되어 일종의 미학적 파탄으로 취급됩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습니다. 소설은 주로 심각한 인생사를 다룹니다. 파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도저도 아닌, 요상한 화법을 용인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다 죽고 나 혼자만 사는’ 이기적인 화법은 소설 모독을 넘어 범죄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소설의 시점(화법)은 어쩔 수 없이 가해자의 시점(화법)과 피해자의 시점(화법)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의 불행이 당연한 것으로 그려지면 가해자의 시점이고 억울한 것으로 그려지면 피해자의 시점입니다. “무슨 말이냐? 자초한 불행이면 그 불행을 당연하게 볼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인간사(人間事) 무엇 하나 자초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태어난 것 하나 빼고는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소치입니다. 그러니, 행, 불행의 원인을 따져서 시점의 당(當), 부당(不當)을 따지는 것은, 적어도 소설에서는, 마땅하고 옳은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행여 오늘 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점(화법)’ 운운하는 것이 최근의 시국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하실 분이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전혀 아닙니다. 며칠 전 우연히 식당에서 들었던 한 대화가 촉발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직(移職)을 두고 듣기에 생뚱맞은 ‘화법’이 나돌았습니다. 마침 제가 좀 아는 일이었습니다. 떠난 이의 이직 사유가 팀 내의 불화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이번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본인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장을 옮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떠나는 입장에서 오히려 팀원들에게 미안해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왜 그렇게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그렇든 안 그렇든, 그 팀의 구성원들은 이제 씻기 어려운 불명예를 안게 되고 말았습니다. 좋은 사람을 공연히 쫓아낸 나쁜 집단이 되었습니다. 보통은 그런 말이 한 번 돌면 너나없이 ‘가해자의 시점’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자신의 원죄가 탕감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일까요? 어쨌거나 ‘가해자의 시점’에서 ‘피해자의 화법’을 사용하는 것은 참 나쁜 일인 것 같습니다. 어디서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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