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강태공이 건국한 제(齊·기원전 1046년?~기원전 221년)는 춘추전국의 춘추 오패와 전국 칠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현재의 산둥 지방이다. 수도는 쯔보시(임치·현 치박)이다. 제는 강제(姜齊·기원전1046년? ~기원전379)와 전국시대의 전화의 후예가 지배한 전제(田齊·기원전386~기원전221)로 나뉜다. 800년 이상 지속된 제나라는 제후로 환공·경공·위왕, 재상으로 관중과 안영, 군사적으로 손무, 손빈, 사마양저, 전단 같은 인물들을 배출한 나라이다.

환공은 희공의 셋째 아들로, 형인 제 양공이 정치를 막장드라마로 만들어 사촌 형제 공손무지에게 살해당했고 무지도 곧 살해당하자 형인 규와 경쟁해 제후에 올랐다. 그는 형인 규의 참모로 자기를 죽이려 한 관중을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포숙아의 권유와 대인배의 기질로 용서하고 재상으로 임명해 제(齊)를 최초의 패자국으로 만들었다. 환공은 부인이 셋, 첩이 여섯으로, 아들은 적자는 없고 어머니가 모두 다른 서자 공자 무궤, 원(제 혜공), 소(제 효공), 반(제 소공), 상인(제 의공), 옹 등을 두었다. 이것이 결국 환공 사후에 골육상쟁으로 본인의 시체가 67일간이나 방치되는 문제로 발전했다. 이런 사태의 원인은 환공의 용인술이 말년에 흐려졌다는 점이다.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였던 제 환공(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은 관중과 포숙아의 충언을 무시하고 관중 사후에 간신인 역아(易牙), 수초(竪貂), 개방(開方)을 가까이 하여 결국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역아는 사람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환공의 빈말에 제 아들을 삶아 바친 인물이다. 수초는 스스로 거세해 환관이 될 만큼 권력욕이 강했던 인물이다. 위나라 공자 출신인 개방은 부모가 죽었는데도 환공의 곁을 비울 수 없다며 가지 않았던 인물이다. 관중과 포숙아는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륜과 도덕을 저버린 자들로 장차 무슨 짓들을 할지 모른다고 질타했고 경계했다.

결국 역아, 수초, 개방은 환공의 눈을 가린 채 국정농단을 자행했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신하를 모두 쫓아냈다. 심지어 환공이 병석에 눕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후계자를 옹립하기 위해서 담장을 쌓아 침전을 폐쇄해버린다. 제나라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그의 유해가 수습된 것은 무려 67일이 지난 뒤였다. 당시 환공의 시신은 참혹하게 썩어 뼈가 다 드러나 있었고 구더기가 들끓었다.

오직 부국강병의 일념으로 밤새 불을 켜놓고 인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정료지광(庭燎之光)고사의 주인공인 환공이 “어진 이를 쓰지 않으면 해롭고, 어진 이를 쓰면서도 소인배를 함께 끼워두면 해롭습니다”고 한 관중의 충언을 무시한 말로는 실로 비참했다.

환공 사후에 역아와 수초의 추대로 공손 무궤가 잠시 집권하고 이후 송 양공의 지원으로 효공이 즉위한다. 이후 개방의 지지로 소공이 즉위한다. 이후 20대 군주 제군 사를 죽이고 의공이 즉위한다. 의공 이후에 혜공이 즉위하여 환공 사후 무려 44년간 자식들 5명이 돌아가면서 제후가 되면서 제나라는 몰락기에 접어들었다.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해야 영예와 치욕을 알며, 위에서 법도를 지키면 육친이 굳건해진다. 예의와 염치가 느슨해지면 나라가 망한다. 아래로 내리는 명령은 물이 땅으로 흐르듯 민심에 따라야 한다”는 관중의 정책을 시행한 환공의 부국강병책과 용인술이‘조국 블랙홀’에 빠진 현재의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부국강병과 검찰개혁, 언론개혁, 교육개혁까지 이루어진 공정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국민의 충신과 간신은 누구인가 묻고 싶다. 역사가 나중에 명확히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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