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술로도 어렵다는 '다보탑 복원' 가장 큰 보람

윤만길 명장이 자신의 일터인 종합석재 창조사 작업장에서 망치와 정으로 돌을 다듬고 있다.
“10원짜리 동전에 도안 돼 있는 다보탑을 한 번 만들어 보고 망치를 놓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노천 박물관이라 일컫는 경주 남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통일전 앞에는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는 남산들이 있다.

이 남산들 한가운데는 매년 가을만 되면 천년고도 경주에서 최고로 꼽히며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은행나무 가로수 길이 펼쳐져 있다.

경주와 울산을 연결하는 국도와 이어지는 이 길을 따라 500~600m 정도 걷다 보면 왼편에 두 손을 합장한 커다란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 조각상은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인 윤만걸(65) 석공의 일터인 ‘종합석재 창조사’의 표지석이다.

△밥벌이로 시작한 석공예 명장의 길.

‘종합석재 창조사’는 5300㎡의 규모의 사업장 곳곳에 화강암 원석과 각종 석조물로 가득 차 있다.

사업장 입구인 합장 조각상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다양한 도구들과 희뿌연 돌가루가 흩날리는 작업장이 나온다. 작업장 한쪽에는 까무잡잡한 모습의 한 인부가 커다란 원석에 걸터앉아 주변 상황에는 아랑곳없이, 오직 망치로 쇠정만 두드리고 있다.

머리에 띠를 두른 채 잠시도 쉬지 않고 망치질을 하고 있는 그는 올해로 47년째 돌을 다듬고 있는 윤만걸 석공예 명장이다.

모난 돌을 다듬어 뛰어난 예술품으로 탄생시키고 있는 윤 명장의 거칠어진 손마디가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보여주는 듯하다.

윤 명장은 울산 정자리에서 출생해 초등학교시절 부산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8세에 상경해 친구의 도움으로 남양주시에서 석재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어려워서 서울로 밥벌이하러 갔다가 돌질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같이 어울리다 보니까 돌 작업이 적성에 너무 맞았습니다”

석재 일을 배워두면 밥은 굶지 않고 아버지 묘석도 직접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데 정신이 팔려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을 먹고, 익산으로 내려가 당시 유명한 석조공인 오영근 선생에게 본격적인 석조공예 기술을 배웠다.

소질은 부족했지만, 주변에 창피를 안 당하려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다 1980년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경주로 내려왔다.

신라 천 년의 고도 경주는 석조문화의 고장인데다 그 당시 안압지 복원공사가 시작돼 많은 일을 하면서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경주로 자리를 옮긴 후 선배의 배려로 경주공업고등학교 뒤편 농장부지에 처음으로 작업장을 갖게 됐다. 그 후 1987년 현재의 장소에 종합석재 창조사를 설립하고 돌을 연구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경주 동남산 인근에 위치한 윤만걸 명장의 일터인 종합석재 창조사 작업장 모습.
△모난돌에 예술혼 심는 석공예.

윤 명장은 독립해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나, 불투명한 장래로 인해 석공이란 직업에 대한 회의적 생각에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일본에서 답사온 석공 가족이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석공예에 대한 인식이 변화할 것이라고 계속할 것을 권유했다.

마침 지역에서도 한창 문화재 복원정비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그때부터 석조물 제작정비 사업에 참여하면서, 석조공예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남다른 노력과 소질로 1987년 문화재수리기능자 석공으로 인준받은 뒤로 많은 자격증을 취득했다.

경북지방은 물론 전국기능대회에서 수차례 우수상을 휩쓸었으며, 1995년에는 드디어 대한민국 석공예부문 명장에 올랐다.

윤 명장은 1988년 경북기능올림픽대회 참가해 명장부 2위 한데 이어 1990년에는 같은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석조공예기능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1991년에는 포항공대 함인영 교수의 신라문화동인회 초청강의에서 ‘포석정의 신비는 장인에 의해서 그 규명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포석정 ‘유상곡수거’의 실제 재현을 위해 수년간 연구와 실습을 하게 됐다.

결국 8년 후 모형 포석정을 만들어 잔을 띄어 보여 성공했으며, 이에 대한 시스템을 2001년 발명특허물로 등록하게 되면서 우리나라에서 포석정 ‘유상곡수거’에 대한 독보적인 전문가로 알려지게 됐다.

1992년에는 전국기능올림픽대회 명장부에 입상했고, 드디어 1995년 5월 석공예 분야에서 기술과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대한민국 석공예명장’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윤만걸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이 50년 가까이 걸어 온 석공의 길을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다.
△문화재 정비·복원참여로 기술 인정

윤 명장은 석공예 명장 선정 이유를 ‘운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지닌 뛰어난 기술로 문화유적 복원사업에 참여하면서 작업 공정 개선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선정됐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서 시작을 했지만, 하다 보니 친구들이 좋아서 어울려 같이 하게 됐고, 또 하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나은 기술을 인정 받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윤만걸 명장이 그동안 문화재 정비 및 복원사업에 참여한 것은 어림잡아 150여 개에 이른다.

특히 그는 경주를 포함한 영남지역 문화재에 대한 보수와 복원사업에 많이 참여했다.

대표적인 복원품은 경주 남산 보물 제1188호 천룡사지 석탑,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탑, 국보 제39호 나원리 5층 석탑, 보물 186호 용장사지석탑 등 폐탑 7기, 통도사 국보 제290호 금강계단, 경남 보물 제467호 표충사 3층 석탑, 영주 초암사, 청송 대전사, 대구 부인사 폐탑 등 수많은 북원·정비 실적을 갖고 있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1995년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1999년 행정자치부장관 표창, 2004년 국무총리 표창, 2004년 경상북도지사 표창, 2009년 문화재청장 표창 등 수많은 포상을 받기도 했다.

윤만걸 석공예 명장은 포석정을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일터 한편에 실물과 같은 크기와 모양의 포석정 모형을 만들었다.
△전통방식의 석공기술 단절 아쉬워.

윤 명장의 일터인 창조사에는 포석정 축소모형, 다보탑, 십이지신상 등 각종 유물의 모형이 전시돼 있다.

관광객이나 후배 기능인들이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역에는 석공예 명장이 자신밖에 없듯이, 갈수록 돌을 만지려는 젊은이들이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후배 석공예 기능인을 양성하고 싶지만, 힘든 노동력에 비해 수입이 변변찮아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행히 두 아들인 동천(42), 동훈(39) 형제가 20여 년 전부터 석공기술을 배우면서 문화재 정비·복원에도 참여하는 등 아버지를 도와주고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윤 명장은 최근 일부 업자들이 기계로 돌을 다듬으며 이질감 나는 석공예품이 나돌고 있어, 혹여나 전통 석공예 기술이 단절되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좀 어렵고, 힘들고,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전통방법으로 돌을 다듬어야 하는데, 쉽게 하려는 행태가 아쉽기만 하다.

50년 가까이 돌을 다듬은 윤만걸 명장은 현대 기술로도 어려운 다보탑을 복원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그가 복원한 다보탑 모형은 불국사에서 울산으로 가는 국도의 시경계 인근 도로변에 실물과 똑같은 모양으로 우뚝 서 관광객을 맞고 있다.

윤만걸 명장은 “다보탑과 석굴암 같은 그런 작품을 답습이라도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나 라는 욕심으로 여기까지 왔다”면서 “평생 다양한 석공예품을 만들어 왔지만, 훗날 후배들의 검증에서 못했다는 말이 나올까 봐 이제는 두려운 마음도 있다”고 말했다.

황기환 기자
황기환 기자 hgeeh@kyongbuk.com

동남부권 본부장, 경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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