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무 대구오페라하우스 예술감독
최상무 대구오페라하우스 예술감독

이번 주에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독일 동부 드레스덴시 중심부에 있는 왕립가극장 ‘젬퍼오퍼’를 소개할까 한다. 드레스덴시는 독일 작센 주의 주도이며 ‘독일의 피렌체’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이다. 1711년에서 1722년에 걸쳐 건립된 바로크 양식의 츠빙거궁전과 왕성(王城)·드레스덴미술관을 비롯하여 오늘 소개할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립 오페라 극장 ‘젬퍼오퍼’가 있는 곳이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빈 슈타츠오퍼’에 ‘빈 필하모닉’ 이라는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있다면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 ‘젬퍼오퍼’에는 560년이라는,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에 빛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상주단체로 있다. 1814년에 호프만이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 감독으로 잠시 있었고 1817년에는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가 부임해 왔다. 이후 베버는 1826년까지 9년 동안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당시 유행하던 이탈리아 오페라를 탈피한 낭만파 독일 오페라의 초석을 다졌다. 이와 같은 베버의 노력은 드레스덴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는데 젊은 바그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 무렵 명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1803~1879)에 의해 새 오페라하우스가 건축되었으니 이 왕립가극장은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젬퍼 오퍼’라고 부른다.

1843년 새롭게 건축된 이 왕립가극장에서는 바그너의 작품 〈리엔치〉가 성공리에 상연되었다. 흐뭇해진 극장 측은 계속해서 그의 다음 작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공연하였다. 이들 오페라의 성공으로 바그너는 30세의 나이에 왕립가극장의 감독에 임명된다. 하지만 6년 뒤인 1849년 5월 9일. 드레스덴 시민혁명 당시 바그너는 연설자로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한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그의 초상화가 박힌 체포 영장이 떨어진다. 바그너는 바이마르로 피난하여 그곳의 궁정 악장이며 훗날 자신의 장인이 될 리스트를 찾아간다. 그리고 리스트의 권유로 위조 여권을 제작, 파리를 경유하여 취리히로 간다. 취리히에서 지낸 5년 동안은 작곡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대신 논문이나 수필을 쓰며 이론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드레스덴 젬퍼오퍼는 1869년 화재를 겪고 1878년 복원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많은 지휘자와 명가수들을 배출했다. 특히 에른스트 폰슈(Ernst von Schuh·1846~1914)의 노력으로 유럽의 일류 가극장이 되었는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화재〉, 〈살로메〉, 〈장미의 기사〉 등이 모두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오페라 공연 때에는 빈, 프라하, 베를린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관객들 때문에 특별열차가 몇 차례씩 운행되었다고 한다. 이 극장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국립 오페라 극장이 되었고, 세계적 지휘자인 카를 뵘이 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2월, 연합군의 폭격기가 사흘간 드레스덴을 집중 포격한 뒤 2만 명 이상 사람들의 목숨과 함께 젬퍼오퍼도 폐허로 변하고 만다. 이후 이 역사적 건물의 복원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던 197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고트 프리트 젬퍼의 원본 설계도가 발견 된다. 덕분에 연합군의 포격을 맞은 지 40년만인 1985년 2월.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시작으로 지금의 ‘젬퍼 오퍼’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은 웅장한 광장, 화려한 로비와 천장의 그림,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대리석 무늬의 기둥들로 그곳을 찾는 이들의 시선을 매료시킨다. 아울러 둥근 원통형의 객석에서는 오케스트라와 성악가 한 사람 한 사람 소리의 밸런스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드레스덴 젬퍼오퍼 극장의 화려함이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상주단체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극장을 만드는 것은 그곳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