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 새경북포럼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영화 ‘플립’은 중학생 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그렸다. 이사한 이웃집 소년과 풋풋한 감정을 주고받는 성장 드라마. 매일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길가의 플라타너스 위에 올라가 교통 방송을 시늉하는 여주인공. 통학차가 어디쯤 오는지 아래쪽 친구에게 알리는 재미로 성심껏 중계한다.

토지를 이용코자 땅주인이 그 나무를 베려고 하자, 그녀는 플라타너스에서 이를 항의하는 소동을 벌인다. ‘13세 소녀 벌목 반대 시위’란 제하로 언론에 보도되나 결국 나무는 잘려진다. 상심한 딸을 위해 아빠는 나무의 그림을 그려 선물하고, 그녀는 풍경화를 보며 위로를 얻는다. 우여곡절 만남을 지속하는 소녀와 소년이 함께 나무를 심으며 화해하는 라스트 신이 감동적이다.

거대한 버짐나무가 교수형(?)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오버랩하는 추억이 있다. 영주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사택과 직장은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였다. 중간쯤 초등학교가 있었고 정문 한쪽엔 커다란 은행나무가 출퇴근길을 반겼다.

부채꼴 잎사귀 샛노랗게 물든 가을철 어느 월요일, 왠지 출근길 창공이 허전했다. 주말 사이에 아름드리 공손수가 사라진 것이다. 까치발로 살펴보니 허연 그루터기만 덩그렇다.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연유를 따졌다. 집안에 낙엽이 떨어진다는 인근 노인네 등쌀에 시달렸다고. 최악의 대응에 아렴풋 실망을 했었다.

노거수를 보면 경건해진다. 묵묵한 성상의 증인 같은 노구의 직립은 장엄히 느껴진다. 정령 숭배 신앙으로 소원을 비는 신령스러운 대상이기도 하다. 당산목이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 애니미즘은 역사가 유구하다.

경주의 계림 숲에는 폐허의 신성함 비슷한 경이가 흐른다. 움푹한 둥치에 시멘트를 발라 치료하거나, 지지대에 의지한 꼬부랑 노목은 투병하는 환자처럼 생의 의지가 넘친다. 세금 내는 나무로 소문난 예천의 석송령과 울진의 대왕송을 접하면, 자신도 모르게 외경심에 젖는다. 농부의 거친 손길처럼 대지를 움켜잡고 비바람 의연히 맞선 세월은 삶의 용기를 북돋는 듯하다.

생로병사는 지구상 생명체에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이다. 포유류 중에는 인간과 더불어 고래의 수명이 가장 길다. 최대 120년 정도. 식물의 수명은 동물보다 훨씬 길다. 5000년 넘게 사는 수목도 있다.

이유는 스스로 자양분을 생산해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면서, 세포 노화가 늦춰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장수하는 생물은 대부분 활동량이 적다. 이에 반해 동물은 움직임이 커서 에너지 소비가 많고 그만큼 노화가 빨리 진행된다는 것이다.

식물을 그린 구석기 벽화는 없다. 말이나 들소, 고래 등등 동물을 그렸다.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어 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오늘날 이들의 중요성은 불문가지다. 기후 변화를 막는 위대한 역할을 맡는다. 광합성 작용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한다. 또한 미세 먼지를 없애고 땅속 미생물에 영양을 공급한다.

카자흐스탄 옛 수도 알마티는 도시 전체가 공원이다. 단적으로 2차선 차도에 6차선 인도와 녹지를 가졌다. 소연방 시절 계획도시라 단순 비교는 무리다. 하지만 나아갈 지향점은 제시한다. ‘그린웨이 생태도시’를 추구하는 포항도 ‘이천만 그루 생명의 나무 심기 운동’을 전개 중이다. 미래를 위한 올바른 선택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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