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집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그때는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란 것이 있어서 비디오테이프를 며칠씩 빌려주곤 했습니다. 주로 극장용 영화들이 많았지만 개중에는 바로 대여점에 나오는 것도 있었습니다.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여러 테이프에 나누어 담은 장편 시리즈물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특별한 취미가 없었던 저는 주말 한가한 때 흘러간 옛 영화나 장편 무협 드라마를 빌려다가 집에서 관람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러 가면 집아이도 따라나서서 자기 것도 하나 얹어서 오곤 했습니다. 집아이는 ‘드래곤볼’이라는 활극 애니메이션을 많이 봤습니다. 서유기의 손오공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아이들 취향에 맞는 보물찾기와 모험담을 담고 있는 만화 영화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집아이는 그것을 몇 번씩 반복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찾아서 전날의 감동과 쾌락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좀 생소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분명 독서(시청)의 경제원리(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냄)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그런 반복 취향에 슬쩍 제동을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완패였습니다. “전에 본 것 아니니?”라고 물었더니, “또 봐도 재미있어요!”라는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경제원리보다는 쾌락원리가 우선이라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당당한 표정을 보며 ‘맞아, 매니아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얼른 꼬리를 내렸습니다. 덕분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반복해서 하고 보고 읽고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느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발견이라면 발견이었습니다.

비디오 보기에서 아이에게서 배운 게 또 하나 있습니다. 그날도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드래곤볼’을 빌려와서 텔레비전을 코앞에 두고 세상모른 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거실에서 비디오를 감상하던 저는 한 번씩 안방으로 가서 아이의 시청 거리를 조정해 주곤 했습니다. 달랑 들어서 뒤로 물려놓으면 어느새 또 바싹 다가앉아서 보곤 했습니다(결국 나중에 라식 수술을 했습니다). 아이를 TV에서 떼어놓으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저도 극의 내용을 조금씩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주인공의 아버지 이름과 아들의 이름이 같았습니다. 두 사람 다 손오반이었습니다. 불가(佛家)의 윤회가 들어와 있나? 문득 아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가 궁금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이름하고 손자 이름이 어떻게 똑같냐?”라고 물었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명명법인데 작품 속에서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가능한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 어리고 순진한 독자의 인식지평을 어떤 방식을 사용해 넓히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말했습니다. “원래 그래요!” 아이는 별걸 가지고 다 시비를 건다는 투로 간단히 그렇게 답했습니다. ‘시작부터 그랬는데, 나는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는데, 그리고 이건 예술작품인데, 그게 무슨 문제지?’ 아마 그런 심정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순간 제게 어떤 자각이 들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원래 그런 것들’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들 위에서 우리의 삶이 축조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저는 그 사건 이후로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원래 그런 것’을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우리네 삶에는 ‘원래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생명이 중하고, 사랑만이 해결이고, 윤리와 정의야말로 마땅하고 옳은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원래 그런 것들’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유전(遺傳)토록 하는 것이 실로 중하다는 생각과 느낌이 각별히 드는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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