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헐어지고,/ 뜰 앞은 쓸쓸하노라./ 내 집을 두른 성벽은/ 비바람에 굴러나노라.// 과학자는/ 그것을 ‘자연 도태’라 하고,/ 내 심장은/ 비운에 울 뿐이노라!// 내 집은 헐어지고/ 나는 외아들이노라./ 헐어지는 내 집을 바로 잡을/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 (‘내 집’ 전문)

“그대여, 실연(失戀)하였거든/ 바다 밖으로 나오라,/ 그때 그대는 새로운 애인(愛人)을/ 만날 것이오니/ 그이에게는 실연(失戀)이 없고/ 오직 뜨거운 사랑만이 있도다,/ 그대의 생명을 다 바치는/ 뜨거운 사랑과 정열(情熱)도/ 그이에게는 외이려, 외이려/ 부족할 뿐이다.(‘조국’ 전문)

흑구(黑鷗) 한세광의 시다. ‘내 집’은 일차적으로는 ‘능라도 실버들 땅에서 높아지고/ 반월도 흰 모래 위에 조약돌 드러나는/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부분) 대동강 변의 고향을 뜻한다. 하지만 이 시는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현실을 노래 한 것이다. 1남 3녀의 외아들로 한 집안을 돌봐야 하지만 비운에 울어야 하는 현실이다. 조국 또한 비바람에 헐리고 무너져 내려 바로 세워야 하는 일제하에서의 비장한 일면을 읽을 수 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 같은 ‘조국’이란 시 역시 주권을 상실한 조국과 광복의 나라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한세광이 필명으로 쓰던 ‘흑구’라는 이름은 서울의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다가 1929년 2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배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옛 것을 버리고 새 대륙을 찾아 대양을 건너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 어딘가 나의 신세와 같다”고 생각한 세광은 흰 갈매기가 아닌 검갈매기를 그의 필명으로 삼았다. 조국을 잃고 끝없이 방황해야만 하는 처지, 검은 빛은 죽음과 상실을 상징하지만 어느 색에도 물들지 않는 굳센 색이기에 ‘흑구’가 된 것이다.

수필가로 널리 알려진 ‘흑구’ 한세광의 ‘민족시인’으로 발자취들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경북일보가 ‘흑구 문학 학술발표회’를 연 데 이어 흑구문학연구소 한명수 작가가 엮은 ‘흑구 시전집’이 출간됐다. 한흑구의 항일시인으로서의 면모가 눈을 비비게 한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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