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능행길에 나서자 영의정 김상철이 말했다. “날씨가 좋아 다행입니다. 배를 타는데도 위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자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라고 정조가 말을 받았다. 임금의 자리도 백성의 마음에 달렸음을 강조한 개혁군주 정조의 정치는 거창하고 요란하지 않았다. 작지만 실천 가능한 것부터 시작했다.

“조선은 앞으로 서얼들도 정치참여의 길을 트겠다. 공자를 섬기는 나라로 서얼이란 이유로 차별하는 나라는 조선 뿐이다.” 서얼 차별을 혁파한 정조는 한양 성 밖 거리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유골들을 수습, 작은 무덤을 만들어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런 지시는 조선 역사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통치자의 갸륵한 마음씨다. 임금의 명을 받은 진휼청에서 37만 개의 유골을 수습,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정조실록엔 ‘개혁’이란 단어가 150건이나 검색돼 영조의 66건에 비해 거의 두 배 반이 된다. 정조는 24년 통치 기간 내내 ‘새로운 인재 발굴’을 시대의 화두로 삼았다. “어진 선비가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이다”라며 초야에 묻힌 선비를 찾아내 천거토록 독려했다.

정조는 권력의 속성은 상대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한 정파를 두둔하지 않고, 코드 일색 인사를 금기시했다. 정조가 사람을 쓸 때는 자신의 개혁정치를 밀고 나갈 사람인가를 판단하고 또 한편으로는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을 중용했다. “강력한 적이 있어야 강력한 내 편이 있을 수 있다”는 용인술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에게 반대되는 세력, 그것도 강한 적을 끌어들였다.

노론을 대표하는 김종수와 남인을 대표하는 채제공은 물과 기름의 관계였지만 정조는 두 사람을 절묘하게 배합, 견제와 긴장관계를 축으로 정치를 펼쳤다. 개혁의 칼은 자신의 복심 좌의정 채제공에게, 그것을 견제하는 역할은 영의정 김종수에게 맡겼다. 김종수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해친 김종후의 동생이었지만 자신의 통치행위가 불편부당함이 없도록 그를 통해 감시케 했다.

개혁과 탕평을 요란하게 내세웠지만 대통령 임기 반환점이 되도록 동종교배 인사로 별로 해놓은 일이 없는 문재인 대통령에겐 정조의 치도가 화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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