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요정 집의 지배인으로 살아가던 병신년(丙申年·원숭이띠)신축월(辛丑月·소달) 경진일(庚辰日·용날) 경진시(庚辰時)생인 이기붕은 10년마다 온다는 대운이 40대 중반 이후 겨울생의 그를 해동시키는 권력의지의 욕망인 편관운인 병오(丙午)와 정관운인 정미(丁未) 대운으로 접어들어 관운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대운이 좋으면 한 인물의 사회적인 활동과 주변환경이 업그레이드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한마디로 타고난 팔자와 같은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만난 격이다. 이기붕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을유년(乙酉年) 1945년 10월 12일 이승만의 귀국이었다. 그는 프란체스카 도너와 친밀해진 권력욕이 강한 부인 박마리아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윤보선의 뒤를 이어 1949년 6월부터 1951년 5월 8일까지 서울시장을 역임했다.

그는 제3대 국방부 장관과 1952년 9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제17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했고 제6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광복군 출신의 철기 이범석 등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한국전쟁 후 1953년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 세력을 축출하였다. 1954년 6월부터 1960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민의원 의장에 당선되었으며, 1954년에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여 가결시켰다.

그의 사주는 습하고 한냉한 습한 사주로만 구성되어 난조한 봄여름의 기상인 목기운과 화기운이 매우 부족하다. 이럴 경우 건강상의 문제가 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렇게 사주가 한습하면 우울증을 주의해야 한다. 그는 실제로 매우 병약했는데, 권력욕이 강해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과 연계, 주먹의 힘을 빌려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웠다. 1956년 민주당이 내세웠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 구호는 국민의 인기를 끌었고, 이에 집권 자유당은 “구관이 명관이다 갈아봤자 별수 없다”라는 구호로 맞섰다. 치열하게 경쟁하던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유세 도중 서거하면서 이승만은 3선에 성공했지만, 부통령에는 이기붕을 제치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1957년 정유년(丁酉年)에는 그는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1960년의 3·15 부정선거는 민주당 조병옥 박사의 서거로 대통령 유고 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의 지위에 이기붕을 앉히려는 음모였다. 결국 경자년(庚子年) 경진월(庚辰月) 4·19혁명이 발생하여 이승만은 하야하고 4월 28일 새벽, 경무대 별관에서 아들 이강석(李康石)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그들 내외가 살던 집은 4·19혁명기념도서관이 건립되었다.

이렇게 타고난 팔자에 부귀를 나타내는 재성(財星)과 관살(官殺)이 약했던 이기붕은 팔자에 약한 정관과 판관으로 부르는 관운이 대운으로 들어와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으나 결국 운이 경자(庚子)년 경진월(庚辰月)의 <천지동(天地同)=복음살(伏吟殺)=전지살(轉趾殺)>의 운세에 멸문지화라는 최악의 정치행보를 마감했다.

이렇게 나무의 나라인 한국은 도끼나 총칼 등의 무기와 같은 편관 역할을 하는 경금(庚金), 신금(申金), 정관의 신금(辛金), 유금(酉金)해에 큰 변혁이 많았다.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 1945년 을유년(乙酉年) 광복, 1950년 경인년(庚寅年)의 한국전쟁, 1960년 경자년의 4·19혁명, 1961년 신축년(辛丑年)의 5·16군사쿠데타, 1980년 경신년(庚申年)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이다. 내년 2020년 경자년(庚子年)도 경금(庚金)의 해이다. 한반도의 큰 변혁이 기다리고 있다. 내년 총선도 경자년(庚子年) 경진월(庚辰月)에 있다. 예상외의 선거결과로 국가의 미래와 정치인의 흥망이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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