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글쓰기 공부의 첫 단계는 설명이다. 특정한 사실이나 사건을 알기 쉽게 전하는 말은 모두 설명이다. 물론 보다 쉽게 알도록 해 주는 것만 설명이다. 분명한 것을 애매하게 만들거나 애매한 것을 더 애매한 것으로 만드는 말은 설명이 아니다. 이때 ‘다르게 말하는 것’도 설명의 한 범주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애매한 것을 애매하게 전하더라도 분명히 ‘말하는 이의 어떤 개별적인 이해(관찰)’를 내포하고 있다면 그것은 설명에 속한다. 일단 설명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글쓰기를 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일기는 주로 설명(보고)문으로 되어 있다. 설명은 글 쓰는 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산이다. 설명 잘하는 이가 오래도록 글을 쓸 확률이 높다. 문자는 설명하고 싶은 자들이 만든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당연히 ‘설명의 도구’로서의 역할이 크다. 설명 욕구가 없으면 기본적으로 글쓰기 적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묘사 공부는 그다음 중요한 단계다. 재미있고 울림이 큰 글이 되려면 치밀한 묘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비유나 예시, 비교나 대조가 적재적소에서 글의 맥락을 탄탄하게 받쳐주어야 좋은 묘사라 할 수 있다. 묘사에는 ‘인삼 묘사’가 있고 ‘산삼(천종삼) 묘사’가 있다. 인삼처럼 오랫동안 공들여 재배되는 게 있고(공부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묘사의 경지) 천종삼(天種蔘·새가 씨를 날라서 파종된 것)처럼 오랫동안 산속에서 홀로 자라다가 때를 만나 세상에 나오는 게 있다. 천종삼 묘사가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랜 기간 발효가 된 정서와 통찰이 만든 언어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서사(사건 서술)와 논증(설득과 주장)은 장르적(전문적) 글쓰기에 진입했을 때 본격적으로 익혀도 되는 기술(記述)의 방법이다. 그다음 단계는 합연(合連)이다. 합연은 설명, 묘사, 서사, 논증을 어떻게 조화롭게 합하고 연결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한 편의 소설을 작성할 때 우리는 몇 번씩이나 퇴고 과정을 거치면서 그 네 분야의 적정 배합을 연구한다. 첫 문장을 묘사(장면이나 배경)로 할 것인지 설명이나 서사로 할 것인지부터 결정해서, 장면묘사나 배경묘사의 비중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시간을 단축해서 행하는 요약 서술에는 서사와 설명을 어떤 비율로 배치할 것인지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조정해야 한다. 그런 일련의 작업이 합연이다. 설명이 길어지면 이야기가 지루하게 되고 서사 위주의 요약으로만 진행되면 울림이 없는 건조한 글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까지가 공통 기초과정이다. 공통 기초 교육과정을 다 이수한 다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과정이 이를테면 맥락, 함축, 여운 등과 같은 것이다.

일찍이 연암이 말한 바대로 좋은 글이 되려면 울림이 커야 한다. 글이 울림을 지니려면 독자 쪽에서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작가와 독자의 협화(協和)가 중요하다. 관심사(주제나 소재)나 표현법에서의 공감이 전제 조건이 된다. 서로 관심사가 다르거나 표현의 취향이 다를 때에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말하자면, 울림이 있는 글, 함축과 여운을 남기는 글쓰기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독자의 기대를 잘 파악하고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의 반응을 염두에 두는 글쓰기가 고급 글쓰기의 첫째 관문이다. 판소리에서도 귀 명창이 가장 우선이듯이, 글쓰기에서도 독자의 공명이 가장 중요하다.

글쓰기 공부의 마지막 단계는 언어의 한계를 아는 일이다. 연암이 함축과 여운을 특히 강조한 것은 언어가 가진 생래적 한계를 본인의 글쓰기 체험을 통해 몸으로 안 결과였다. 연암이‘소단적치인’에서 “군자는 부상자를 거듭 상해하지 않고 반백의 늙은이(도주하는 나이 든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글쓰기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언어를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와 자세의 차원에서 함축과 여운을 논한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