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우환·변고가 있을 때마다 '우는 느티나무' 아시나요?

포항 초곡숲의 느티나무 노거수와 칠인정

포항시 북구 흥해에는 나라의 우환이나 변고가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낸다는 ‘우는 느티나무’가 있다.

신라의 만파식적이나 낙랑의 자명고처럼 앞날을 예고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셈이다. 피리나 북처럼 소리를 내는 악기는 아니지만, 사실 나무는 만물의 변화와 순환 속에서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 자연의 악기라 할 수 있다.

만물이 변화하는 소리를 나무는 담아내고 있지 않은가. 봄이면 마른 가지에 싹이 돋아나는 소리, 여름이면 그 잎이 무성해지며 꽃을 피우는 소리, 가을엔 열매가 무르익어 번지는 소리, 다시 겨울이 올 때면 맨 가지를 드러내며 바람에 스치는 등 나무가 선사하는 소리는 풍성하다. 이렇게 자연의 변화를 전달하기에 우리 선조들은 나라의 운명이나 마을의 변화마저도 전해주는 신령스러운 나무가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그런 나무일수록 영험한 기운과 늠름한 자태를 가지고 있어 바라보는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을 압도하는 뭔가를 지녔을 것이다.

포항 초곡 마을숲 느티나무 노거수.

우는 느티나무는 초곡리라는 인동 장씨 집성촌에 있다. 이곳은 흥해읍에서 서쪽으로 약 4㎞가량 떨어진 곳인데 마을이 생긴 지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입구에는 인공으로 판 커다란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300년 넘은 배롱나무가 있다. 배롱나무는 꽃이 100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 불리는데 이렇게 긴 개화기를 지닌 나무는 많지 않다. 부처꽃과로 분류가 되어선지 스님이나 선비가 이 나무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배롱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이 나무의 줄기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일반 나무줄기에서 볼 수 있는 껍질이 없기에 배롱나무는 대나무처럼 줄기가 반질반질 하면서도 대나무와 달리 속이 꽉 차 있다. 그래서 겉과 속이 같은 배롱나무를 빗대어 조상들은 세속의 묵은 껍질을 훌훌 털어버리기를 바랐고 일편단심으로 벗을 그리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포항 초곡 마을숲 연못.

연못 근처에는 ‘사일(士逸)쉼터’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정자가 있다. 초곡리의 또 다른 마을 이름이 사일(士逸)인데 이는 마을 어귀에 숲이 있어서 선비들이 숨어 살기에 적당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지금이야 한적하고 번잡한 곳을 벗어나 전원생활을 그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지만, 그 옛날 이런 외진 곳에 들어와 선비가 살고자 한데는 어떤 까닭이 있었을 것이라고 봐야 하겠다. 이러한 내력을 간직한 채 긴 세월 이 마을의 변화를 지켜본 ‘칠인정(七印亭)’(경상북도 문화재 제369호)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우는 느티나무는 바로 이곳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칠인정은 맨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하고 정착한 인동 장씨의 입향조인 장표에 의해 건립된 건축물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의 무인으로 흥의위(興義衛) 보승낭장(保勝郞將)이라는 지위를 지낸 젊은 장수였다고 하는데, 고려 말 왕조가 바뀌는 혼란기에 세상에 대한 염증을 느껴 고향인 구미로 낙향하다가 벽지인 이곳에 이르러 일가를 이뤘다고 한다. 당시 고려가 멸망하자 일부 고려의 신하들은 낙향하거나 외부와의 접촉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지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속세와는 절연한 채 은둔자로 지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은둔이나 소식 두절의 상태를 표현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이때 시기에서 파생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선의 건국이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통해 전개한 상황이었던지라 새로운 왕조를 거부한 고려 신하 72명이 개성의 두문동에 깊숙이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고 한다. 이성계는 이들을 설득해 등용하려 했지만, 이들이 움직이지 않자 두문동에 불을 내어 강제로 끌어내려 했는데 이들은 끝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불에 타죽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어느 곳에 한 번 들어갔다가 영영 소식이 없을 때 두문불출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다고 하는데, 내용을 알게 되면 이 말에 깃든 비장함을 느낄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배경을 연결해 초곡리를 ‘포항의 두문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 칠인정을 건립한 장표가 이 건물의 낙성식을 거행했을 때가 조선 태종 9년(1409년)으로 이때 그의 아들 네 명과 사위 세 명이 모두 관직에 있어 여기 정자 앞에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에 벼슬에 증명하는 관리의 인(印)을 담은 교지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자의 이름을 칠인정으로 명명하게 됐다는 내용이 마루 상단에 걸린 편자에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도 알 수 있지만, 세상사의 회의를 느껴 숨어든 선비가 자식의 출세를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져 왠지 모순된 상황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 입장에서 자식의 입신양명을 바라는 것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살이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칠인정은 마을 입구에 있는 연못 옆으로 이어진 오르막으로 올라 다소 높은 대지에 정남향으로 있다. 두 개의 방과 마루로 구성된 소박한 형태이지만 정자 앞마당에는 이곳의 운치를 더하는 우는 느티나무가 있어 결코 허술하게 보이지가 않는다. 이 거목의 둘레는 양팔로 안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두꺼우며, 나무의 줄기 밑동이 두 가지로 뻗어 있어 마치 쌍둥이처럼 보인다. 이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나라의 큰 우환이 닥칠 때면 “우우~”하며 우는 소리를 냈는데 6·25전쟁 때 이 나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마을주민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모진 시기를 극복해나가 지금도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내려 거목으로 자리한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그 자체만으로 매우 거룩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규모가 크고 오래되어서 노거수를 보호하자는 게 아니다. 이 나무들은 우리 고장의 역사와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칠인정 앞에 이 우람한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자리하지 않았다면 이곳의 풍경은 많이 달라져 보였을 것이다.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된 칠인정은 고택이 많지 않은 우리 고장에 더욱 중요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자는 우리나라에 널리 퍼진 건축물로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지향했던 우리 선조들의 정신적, 미학적 세계관이 응축되어 있으며 기능적으로 마을 공동체에서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물론 선비나 양반들의 사적 공간이자 향교나 사림의 중심 공간으로도 활용했던 공간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우리 고장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노거수와 마을숲을 찾아다니는 일은 자기 마음속의 나무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오래된 나무와 숲들은 하나같이 의미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 고장의 변천사를 간직하고 있는 동시에 세상사의 여러 맥락을 느끼게끔 한다. 노거수와 마을숲을 보호하자는 의미는 환경을 보호하자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마을숲은 우리 포항의 역사와 포항 사람들의 마음을 방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원 경북 생명의 숲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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