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영화에서 억울한 사람이 처절하게 “법대로 합시다, 법대로!” 하고 외치면, 그는 흠씬 두들겨 맞고 십중팔구 영화 초엽에 죽는다. 만약 그를 억울하게 만든 사람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래…법대로 한번 해 봅시다” 하면, 그 억울한 사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죽을 고생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법대로”는 약자가 아닌 강자가, 외치는 대신 속삭인다.

법에 무엇인가 호소하고 싶어 하는 약자는 정확히 말하면 법이 추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조문은 이런저런 용어와 조건 등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정의하고 구획하며,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을 추상해 내야 하기 때문에 그 법이 담아내고자 하는 취지를 모두 표현하지 못한다. 이 필연적인 한계 때문에 법의 조문을 꼼꼼히 따지는 자가 속삭이는 “법대로”와 법의 이상에 매달리는 약자가 외치는 “법대로”가 다투면 언제나 전자가 이긴다. 우리처럼 촘촘하고도 방대한 법체계를 가진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법대로” 돌아가는 세상의 강자는 누구인가? 직업군으로 보자면 당연히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법 해석만 하는 법학자 말고 법을 직접 다루는 입법, 사법, 행정부의 사람들이 더 힘이 세다. 그런데 입법부는 아무래도 법을 만드는 목적에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라 그 힘을 실감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이에 비해 법조문을 해석해서 최종 판단을 내리는 사법부는 더 강해 보인다. 행정부는 입법에 의해 제한을 받고 최종판단도 하지 않지만 그 한계 내에서 법을 해석하여 바로 집행하기 때문에 피부에 와 닿는 힘으로는 최고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역시 검찰과 경찰이다. 예를 들어 법은 이들에게 경우에 따라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전화기를 빼앗아갈 권한까지 허용하는데, 법이 모든 경우를 세세하게 규정할 수 없으니 결국 누구 집에 들어가고 말고는 그들의 해석에 맡겨진다.

능력으로 보자면 “법대로” 세상에서는 시간과 돈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유리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사실 법이나 법관이 불공정한 경우보다 복잡한 세상에 불가피하게 많아진 법조문과 판단체계 때문에 생긴 구조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법적 판단에 실수가 없도록 신중하려다 보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데, 그 시간에 강한 사람, 그러니까 판단에 걸리는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이나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이고 줄일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건 파일을 복사하는 사람이나 놀고 먹어서 시간이 많은 백수,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시간을 벌거나 줄여줄 수 있는 전관, 그 전관을 고용하는 부자가 다 강자가 될 수 있다

“법대로” 세상에 유리한 성격도 있다. 바로 뻔뻔함인데, 개인뿐 아니라 집단도 종종 이런 특징을 보인다. 뻔뻔한 사람이나 집단은 어떤 법이든 그 법이 실현하고자 하는 정의에 전혀 관심이 없고, 법조문을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지키는 데 모든 것을 건다. 법정신에 명백히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 법치국가를 강조하고, 남의 등을 쳐서 돈을 번 다음 자신의 재산권을 지켜 달라고 부르짖으며,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피해를 주면서 사상의 자유를 주장한다. 이들은 법조문이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정당한 법 집행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데에도 능하다. 불리하면 반성하다가 조금만 분위기가 바뀌면 표변하여 무죄를 주장하며,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고 가짜뉴스를 뿌려댄다.

한국 사회는 무법천지가 아니지만, “법대로” 세상에 유리한 직업, 능력, 성격을 가진 자들이 너무 많이 겹쳐 있어서 불행하다. 이들 직군, 능력, 성격 중 두 가지 이상을 가진 자들을 영구 격리시키면 참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런 법은 불가능하다. 유력한 직군에 속한 이들의 잘못을 더 엄하게 벌하는 법을 제정하고, 약자들이 구조적 불이익을 받지 않게 제도를 만들고, 온 사회가 뻔뻔한 자들을 깊이 경멸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정도가 대안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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