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동상

집에 돌아왔다. 능소화가 주홍빛을 활짝 열고 집 앞을 밝혀 놓았다.

순이 남편은 꼬박 열흘을 입원한 후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설사는 멈췄지만 몇 달치 약을 처방받았다. 막 출발하려던 둘째아들이 차창을 내리더니 얼굴을 밖으로 내밀며 또 당부했다. 치매가 진행되는 걸 막아주는 약이니까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해요. 순이가, 걱정 말어 걱정 말어,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하고 나서야 차가 출발했다. 일 톤 탑차가 둥구나무를 돌아갈 즈음에야 순이 머릿속에 운전 조심하라 소리를 못 한 게 떠올랐다. 순이는 탑차 꽁무니를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운전 조심혀, 운전 조심혀. 차가 지나간 동네 어귀 자락에 노을이 붉은 마음을 흐트러트려놓았다. 엄니.

작은 동생을 업고 큰 동생을 걸려서 산마루로 가 있으면 호미가 든 망태를 든 채 터벅터벅 고갯길을 올라오던 순이 엄마, 멀리서 보는 엄마 눈은 늘 산 노을로 붉어져 있었다. 오늘 순이의 주름진 동공에 열 살의 노을이 가득했다.

순이는 마당과 부엌을 오가며 분주히 움직였다. 이리저리 왔다갔다했지만 마당에 서서 바라본 늦봄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순이가 마당 한 가운데 있는 호미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짝을 뗬다. 아이구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이는 아이구 소리를 발로 디디며 호미를 집어 들었다. 호미에 붙은 마른 흙을 툭툭 떨곤 울타리 가까운 구석으로 호미를 조심스럽게 던졌다. 순이는 손등과 손바닥을 옷에 문대며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다 마당을 다시 봤다. 한 번에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던 남편 잔소리가 순이 귀에 들리는 듯 했지만 더는 기운이 없었다. 어둑한 방안으로 들어가던 순이의 한쪽 다리가 문지방에 걸렸다. 아이구 아이구 소리 지르며 벽을 짚은 순이가 겨우 몸의 균형을 잡고서 누워있는 남편을 살폈다. 순이 남편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잠이 들면 아무 기척도 듣지 못하는 순이와 달리 순이 남편은 잠귀가 밝았다. 전 같으면 끙하고 허리를 뒤척였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방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순이 눈에 사진이 보였다. 순이는 벽에 걸린 사진 속 젊은 남편과 젊은 자신을 오래 보았다.

쩍 벌어져 듬직했던 어깨는 쭈그러졌고 살집이 있어 보기 좋던 허벅지는 순이보다 가늘어졌다. 언제 저 사람이 이리 작아졌나. 이불을 펴고 남편 옆에 누웠지만 순이는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순이는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남편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코 골며 자는 남편이 숨을 쉬는지 살피던 순이가 문득 상체를 들고 어이없는 듯 허공을 쳐다봤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순이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이구 아이구 소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또르르 굴러갔다. 큰 딸이었다. 식당 일이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화를 한다며 잘 도착했는지 물었다. 잘 도착했고 모든 것이 편안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선 순이가 남편 쪽을 봤다. 순이 남편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식당 일이 바빴다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순이는 손을 뻗어 남편 손을 만졌다. 거친 손가락에선 이제 살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외로움을 잡아보는 순이의 늙은 손끝이 아려왔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뽑고 또 뽑았을까. 순이는 쉬이 잠들지 못하던 남편의 많은 밤들을 헤아려봤다. 또 전화벨이 울렸다. 순이 남편이 작게 끙하고 소리를 냈다. 순이는 깜짝 놀라 남편 쪽을 바라보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전화기를 들었는데 벌컥 소리가 났다. 순이는 작게 누구쇼, 라고 물었다. 큰아들이었다. 잘 도착했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둘째아들이었다. 바로 받는 걸 보니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나 봐요. 잘 도착했으니 어서 주무셔요. 둘째아들의 전화를 끊고도 순이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 했다.

다음 날 아침, 순이가 약봉지를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남편에게 챙겨주어야 할 아침약이 어느 것일까? 글을 모르는 순이를 위해 둘째딸이 그려놓은 동그라미와 별표 사이를 헤매는 중이었다. 작년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뒤로는 세상이 참 자세히도 보였다. 눈이 나빠질 때는 서서히 진행되었으므로 그 결을 느끼기 어려웠다. 수술을 받고 눈이 한 번에 좋아지자 세상이 화들짝 달라 들었다. 조금 찌그러진 동그라미, 끝과 끝이 살짝 맞닿지 않은 별모양, 그리고 아주 잘 인쇄된 글씨들을 노려보던 순이가 전화기를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남의 빵가게 부엌에서 빵을 굽는 둘째딸이 정해준 아침은 동그라미였다.

수술을 받고 처음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날, 순이는 동네를 둘러보며 마냥 신기했다. 둥구나무의 나뭇잎 뒷면을 들추다 그 잎맥에 눈이 갔다. 처음 잎맥을 보는 사람처럼 정신이 팔려 있는데 버스기사가 안 탈거냐고 소리 질렀다. 그제야 마을버스가 왔다는 걸 알고 서둘러 버스에 오르려던 순이가 버스 앞문 난간을 잡은 채 주춤했다. 마을버스에 쓰인 숫자가 너무 또렷했다. 순이는 명확해진 모양이 너무나 낯설어 덜컥 겁이 났다. 이 버스가 내가 타도되는 버스일까. 기사가 안 탈거냐고 다시 재촉했을 때 순이는 엉겁결에 읍내 가는 거 맞지요? 라고 물었다. 기사는 어이없다는 듯, 가요, 라고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십 년 넘게 타고 다닌 버스 안이 너무 서름해서 순이는 외로웠다. 순이는 처음 잎맥을 본 날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그런 날은 기억나지 않았다.

6. 25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왔지만 순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순이 엄마는 그 이듬해에 일곱 살 순이를 데리고 시집을 갔다. 개울에서 빨래하던 순이 엄마가 하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니 큰아버지들이 너랑 나를 서둘러 시집보내버린 건, 느 아버지 앞으로 나온 사망보험금을 한 푼도 안 주려고 그런 거여. 그게 어떤 돈인디, 그게 어떤. 그때 순이 등에는 둘째동생이 잠들어 있었다. 수절도 먹고 살 만해야 하는 거여. 우릴 먹이는 게 아까웠던 게지. 지금 같으면 악착 같이 달라 들어 좀 챙겨 받았을 텐디. 그러면 널 핵교에 보낼 수도 있을 텐디. 병신 같이, 병신 같은 게 아니라 병신이지. 지 서방 목숨 값도 못 챙기는 게 병신이지, 다른 게 병신이간데. 아랫동네선 딸들도 핵교에 보내던디. 순이 엄마가 빨래방망이를 다시 들어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린 순이는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흰 구름을 손으로 흐트러트리며 놀았다. 그렇지만 손짓을 멈추면 흰 구름은 이내 개울 위를 또 흘러갔다.

새아버지는 마흔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가고 있던 노총각이었다. 새아버지 집은 산속에 있었고 집 앞 비탈진 작은 밭엔 풋배추가 자라고 있었다. 세 가구만 사는 외딴 동네였다. 새아버지는 나무를 해 내다 파는 나무꾼이었고 그때 순이 엄마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순이 엄마는 시집 간 이듬해 풋것이 텃밭에 노란 속을 다시 올릴 때 첫아들을 낳았다. 새아버지는 부지런히 나무하러 산에 다녔고 순이 엄마는 산 아랫마을로 남의 집 밭일을 하러 다녔다. 남동생을 돌보는 일은 순이가 도맡았다. 남동생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 순이 엄마는 둘째 남동생을 낳았다. 순이 엄마는 여전히 아랫동네로 남의 밭일을 하러 다녔다. 점차 텃밭이 늘어가 순이 엄마가 아랫마을로 일하러 가는 날이 줄었지만 농번기에는 여전히 아랫마을로 일하러 다녔다.

순이는 보름달을 좋아했다. 둥그런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순이는 엄마와 목욕을 했다. 순이 엄마는 보름달이 둥둥 뜬 우물물을 두레박 가득 퍼 올려 솥 가득 붓고 데웠다. 순이가 엄마를 마음껏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모녀가 오롯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순이도 순이 엄마도 보름날을 기다렸다. 그것은 둘만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열일곱 유월의 달밤이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순이가 문이 삐걱대는 소리에 목욕통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문 쪽을 쳐다봤지만 더는 문이 삐걱거리지 않았다. 산 쪽에서 바람이 세게 부는지 부엌 흙벽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순이는 손으로 물을 끼얹으며 젖가슴 사이를 문질렀다. 더 커질 듯 자란 가슴을 보며 순이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광에선 순이 엄마가 며칠 전에 수확한 감자를 고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듯 갑자기 숙였던 허리를 펴더니 천장에 느슨하게 매달린 백열전구 스위치를 돌렸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안을 밝히던 빛이 사라졌다. 순이 엄마는 정리하던 감자를 그대로 놓아두고 불 꺼진 광을 나왔다. 시간이 벌써 이리 지나버렸네, 순이 등이라도 밀어줘야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부엌 쪽으로 가던 순이 엄마가 걸음을 멈췄다. 닫아놓은 부엌문 앞에 순이 새아버지가 있었다. 등을 구부리고 문틈으로 안을 엿보는 순이 새아버지, 오른손이 바지 아랫도리 위에 있었고 눈은 부엌 안을 보느라 문틈에 쳐박고 있었다. 두툼한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순이 엄마는 집 모퉁이 기둥 뒤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산 쪽에서 바람이 불어 온 것은 그때였다. 바닥에 있던 마른 나뭇가지들이 두두두둑 소리를 내며 마당 한끝으로 날아갔다. 깜짝 놀란 순이 새아버지가 얼른 몸을 문에서 떼더니 부엌 쪽 모퉁이를 돌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순이 엄마는 반대쪽 모퉁이 기둥 뒤에 서서 날아간 나뭇가지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정신을 차린 순이 엄마가 뛰다시피 걸어서 부엌으로 갔을 때 순이는 열심히 때를 밀고 있었다. 이제 어엿한 아가씨로 자란 딸의 등을 문지르며 순이 엄마가 연방 말했다. 많이 자랐네, 많이 자랐네. 달이 참 밝은 밤이었다.

다음 날부터 순이 엄마는 순이 혼처를 수소문했다. 그해 가을걷이가 끝난 후, 아랫마을 송 씨 네에서 몇 년 째 머슴 살던 총각과 순이를 서둘러 짝지었다.

주민 센터 다목적실 앞에 서서 순이는 감자밭으로 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열흘 전 줄거리를 배어낸 감자밭이 붉은 민낯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혹 비라도 오면 어쩌나, 때를 놓치면 잘 여문 감자알들이 땅속에서 썩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병원에 있는 내내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다목적실로 들어가는 은빛 철제문은 묵직해보였고 꽁꽁 닫혀있었다. 순이가 윗도리를 손으로 쓱쓱 쓸었다. 낡은 윗도리에 핀 능소화 위에 머리카락이 보였다. 순이가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집으려는데 계속 미끄러졌다. 침을 묻혀서야 겨우 집어낸 머리카락을 바닥에 털어버렸다. 순이는 옷자락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거렸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 윗옷은 오래입어 천이 낡았다. 색이 흐려진 능소화 꽃잎이 시들어보여서 순이는 서글펐다. 시장에서 옷을 함께 고르며 깔깔거리던 개똥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읍내를 나올 일이 있으면 늘 함께 다녔던 친구가 오늘 옆에 없다는 걸 실감했다. 순이는 능소화를 다시 손으로 쓱쓱 쓸며 다음에 올 때는 옷에 좀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순이는 심호흡을 하고 밤새 연습한 걸 떠올리며 문을 세게 밀었다.

의외로 확 열리는 문. 당황한 순이를 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봤다. 칠판에 뭔가를 쓰고 있던 강사도 활짝 열린 문 쪽을 돌아봤다. 순이는 가슴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안 그런 척하며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교실엔 책상과 의자 들이 감자 고랑처럼 고르게 놓여있었다. 한눈에 봐도 교실 안엔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베트남에서 온 여자, 미얀마에서 온 여자, 필리핀에서 온 여자 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는 교실에는 빈 자리가 많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어르신. 강사가 물었다. 순이가 아랫입술을 조금 내민 채 입을 꽉 다물고 답을 하지 않자, 강사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건강노래교실은 오후에 있는데요. 순이가 입을 열었다. 여가 다문화한글교실인가요? 교실 중간쯤에 멈춰 선 순이에게 강사가 말했다. 아! 편한 곳에 앉으세요. 순이가 교실 안을 둘러봤지만 그런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앉을 자리를 정하지 못하는 순이에게 강사가 다가오더니 맨 앞줄을 가리켰다. 개똥 엄마가 죽은 후 일절 읍내에 나가지 않는 순이에게 둘째 딸이 말했다. 집에만 있지 말고 주민 센터에서 하는 노래교실이라도 다녀보셔요. 글을 읽을 수 없는 순이는 노래교실에서 나눠준다는 악보가 무서웠다. 자꾸 노래교실을 권하는 둘째 딸에게 차마 그렇게 말하지도 못하고 농사 일이 바빠서 그런데 다닐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댔다.

수업이 끝났다. 다음 시간에 보자는 강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젊은 여자들이 다목적실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이에게 강사가 이틀 뒤 같은 시간에 수업이 있다고 한 번 더 일러줬다. 순이는 예, 라고 짧게 답하고 다목적실을 나왔다. 교실을 나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방에 차려놓은 점심상은 먹었으려나. 지금껏 자고 있는 것은 아니겄지. 아침약은 동그라미, 저녁약은 별표, 점심약은 표시 없이 글자만 있는 거. 순이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마음은 급한데 계단참을 내려서는 걸음은 자꾸 주춤거렸다. 순이가 주민 센터를 나와 버스정류장에 막 도착했을 때 왁자지껄한 소리가 났다. 순이는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젊은 여자들이 유모차를 밀며 주민 센터를 나오고 있었다. 아까 서둘러 교실을 나갔던 여자들이었다. 조금 어눌한 한국말 사이사이 잦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이는 주민 센터에서 공부하는 동안 일층 놀이방에 아이를 맡길 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젊은 엄마들이 유모차를 밀며 수다를 떨 때 아이들은 유모차에 탄 채 서로 장난을 치며 다가왔다.

순이는 결혼 후 첫딸을 낳고 아들 둘을 내리 낳고 막내로 딸을 낳았다. 세를 살던 순이네가 첫딸을 낳고 어렵게 마련한 집은 산 바로 밑에 있었다. 둘째 아들이 백일을 막 넘겼을 때 아랫동네에 야학이 열렸다.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 마을회관에 형광등을 켜놓고 한글을 가르쳤다. 마침 그해 순이네는 첫 논농사를 시작했다. 어린 자식들도 우리 논이 생겼다며 부자라도 된 듯 즐거워했고 순이 부부는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밭으로 논으로 종종거리다 보면 어느새 까맣게 어두워져 있었다, 야학은 이미 시작한 후였고 순이네 식구들은 저녁을 먹어야 했다. 순이는 하필 야학을 시작하는 첫날, 둘째 아들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그때 야학에 다녔을 거라고 두고두고 말했다. 순이는 젖먹이 등을 토닥거리며 옆집 개똥 엄마가 야학 갔다 돌아오는 고무신 소리를 기다렸다. 졸다가 깨선 내일이라도 나가볼까 생각했지만 뽑아도 뽑아도 쑥 쑥 자라는 잡초처럼 순이가 뽑고 다듬어야 할 집안일들이 밤새 자라 순이를 기다렸다. 논에서 피를 뽑으며 오늘은 꼭 야학에 가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순이는 끝내 야학에 나가지 못했다.

순이는 버스에서도 내내 마음이 불안해 앞자리 의자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동네에 들어서니 마음이 더 급해진 순이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뛰듯이 걸었다. 순이네 집은 아침과 같았다. 대문은 잘 닫혀있었고 어제 저녁에 급한 대로 정리한 마당도 그대로였다. 순이는 안심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에 누워 있어야 할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순이가 깜짝 놀라 남편을 불렀다. 창고에도 가보고 뒤뜰에도 가봤지만 남편을 찾지 못했다. 순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방으로 돌아왔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있어야 할 자리엔 전기장판만 있었다. 순이가 장판을 만졌더니 뜨거웠다. 아이구, 이걸 틀어놓고 어딜 간 거여. 순이가 전기장판 코드를 뽑지 않고 나가기라도 하면 버럭 소리 지르던 남편이었다. 순이는 남편의 화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해 얼른 코드를 뽑고 방을 나왔다. 순이는 집 밖으로 나와 동네를 돌아다녔다. 동네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순이는 남편과 동네사람들이 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순이는 감자밭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음은 서늘한데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다른 집 감자밭은 이미 수확을 끝내 황토 흙이 파헤쳐져있었다. 마을에 붉은 노을이 내려와 있는 것 같았다.

순이는 병원에 있는 내내 남편 배에 핫팩을 올려놓아야했다. 삼십분이면 온기가 모두 빠져나가서 한 시간마다 키친이라는 곳으로 가서 전자레인지로 데워오기를 반복했다.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담당간호사가 순이에게 본관이니 별관이니 엘리베이터니하며 핫팩을 살 수 있는 곳을 설명하려했지만 순이는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설령 어찌해서 그곳을 찾아간다고 해도 병실로 다시 돌아오는 길을 잃고 헤맬 것 같아 두려웠다. 순이가 못 알아듣는 척하자 간호사는 병원 거라며 핫팩 하나를 빌려줬다. 꼭 베개 만 한 크기의 핫팩은 황토 빛깔이었다. 순이는 핫팩을 들고 병원 복도를 걸어 키친이라는 곳을 찾아가야 했다. 대학병원 곳곳에는 한글과 숫자와 영어가 섞여 붙어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그 글자를 가리키며 뭔가를 설명했다. 당연히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순이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까막눈이라고 무시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지내다보니 병원에 있는 날이 길어질수록 말수가 점점 줄었다.

감자밭으로 가는 동안에 순이는 남편을 계속 불렀다. 고개 넘어 감자밭에 도착했지만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구 이런. 순이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던 거여. 순이가 손바닥으로 땅을 쳤다. 그때 감자밭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이가 벌떡 일어났다. 남편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감자밭 안으로 순이가 허겁지겁 들어가 헤매는데 아래쪽 고랑에서 순이 남편이 몸을 일으켰다. 남편을 발견한 순이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집에 있어야지 이렇게 나오면 어떡혀. 소리를 지른 순이도 움찔하고 그 소리를 들은 순이 남편도 움찔했다. 순이 남편이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잊고 있던 걸 기억해낸 듯 소리 질렀다. 감자 캐러 왔어. 순이가 점심 약 먹어야 하는디, 이러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중얼거리자 순이 남편도 무안한지 낮게 중얼거렸다. 점심 약은 벌써 먹었지. 감자 두 자루 캤더니 좀 되더라고. 순이는 남편의 볼 주름 골로 햇살이 고이는 걸 봤다.

순이네는 읍내 감나무 집 행랑채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작은 부엌이 딸린 단칸방에 살면서 순이 남편은 여전히 송 씨네 일을 다녔다. 하루는 순이가 남편에게 송 씨네 일을 함께 하러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내가 계속 머슴 살 사람 같어? 내가 왜 송 씨네 어른 댁에 살림집을 차리지 않았는디. 내가 왜 멀리 읍내에 살림을 차렸는디. 순이 남편은 냉수를 급하게 들이켜는 사람처럼 벌컥벌컥 화를 냈다. 그때 남편이 얼마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웠던가.

햇살알갱이들이 물소리 따라 흩어지며 반짝이던 날, 순이가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을 빨랫감에 붓고 있었다. 그때 대문이 열리며 누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엄마, 나 왔어.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여학생이 책가방을 손에 든 채 안채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엄마, 나 왔다구. 순이가 누구세요? 라고 조심스럽게 묻자, 여학생이 오히려 그렇게 묻는 댁은 뉘신지 하는 표정으로 순이를 봤다. 아, 행랑채에 들어온 새댁? 여학생은 안채 마루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우리 엄마, 집에 없어요? 잠시 뒤에 대문이 열리며 주인아줌마가 들어왔다. 아이구, 우리 딸 왔구나. 도시로 나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주인집 딸이 겨울 방학이 돼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다음 날 오후, 주인집 딸이 아까부터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순이는 마당에서 천천히 빨래를 걷고 있었다. 오늘 굳이 또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됐지만 순이는 아침 일찍부터 빨래를 했다. 아침나절에 넌 빨래는 젖은 채 얼어 있었다. 빨래를 걷던 순이가 주인집 딸을 힐긋거리다 둘이 눈이 마주쳤다. 주인집 딸은 얼른 책으로 다시 눈을 돌렸고 순이는 빨랫줄의 빨래를 만지작거렸다. 주인집 딸 친구가 찾아 온 것이 그때였다. 이름을 부르며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친구를 보자마자 주인집 딸은 읽던 책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서로 끌어안고 발로 구르더니 두 손을 잡고 흔들다가 팔짱을 끼고 집을 나갔다. 순이는 주인집 딸과 친구의 목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안채 마루 쪽으로 갔다. 손에 들고 있던 빨래를 내려놓고 책을 집어서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표지엔 햇볕에 그을린 노인과 푸른 물이 일렁이는 바다가 그려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물이 쏟아져 나와 마당을 파랗게 적실 것 같아 얼른 도로 뒤집어 내려놓았다. 순이는 젖은 빨래를 가슴에 끌어안고 행랑채로 뛰듯이 들어왔다.

겨울 방학 동안 순이와 주인집 딸은 제법 말도 나누고 친해졌다. 순이와 주인집 딸은 동갑이었다. 해가 바뀌고 그들은 열여덟이 되었다.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주인집 딸이 걱정스러운 듯 순이를 봤다. 우물가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하던 순이가 물로 입을 헹구고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주인집 딸과 주인아줌마가 나가고도 순이는 그대로 마당에 서 있었다. 치맛자락으로 입을 훔치며 주인집 딸 가방에 들어있을 바다를 떠올렸다.

여름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을 때 불쑥 주인집 딸이 왔다. 방학이 아직 아닐 텐데, 어쩐 일일까. 순이는 안채를 자꾸 기웃거렸다. 그날 밤, 주인아줌마가 방 안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주인집 딸이 우는 소리도 들렸다. 여자가 대학은 무슨 대학이야? 고등학교도 넘쳐. 절대 안 돼. 주인아저씨가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주인아줌마가 또 소리 질렀다. 평소 아줌마는 말수가 적었다. 주인아저씨가 뭐라 잔소리해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일만 했다. 주인아저씨가 집 밖으로 나가면 아들 못 나은 게 죄지, 라고 중얼거리며 일했다. 순이는 가슴을 졸이며 주인집 안방에 귀를 기울였다. 왜 하나밖에 없는 자식 공부도 못하게 하냐고, 대학에 안 보내주면 애 데리고 이집에서 나갈 테니, 당신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인아줌마가 소리치다가, 급기야 내가 이 집 종년이야? 악을 썼다. 주인집 딸이 흐느끼는 소리가 방밖으로 흘렀다.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인아저씨가 걸어 나가는 발소리가 마당 안으로 울렸다. 대문을 발로 걷어차고 집밖으로 나가는 주인아저씨가 누구에겐지 모를 욕설을 내뱉었다. 순이가 방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니, 주인집 안방문도, 대문도, 너무 세게 연 탓에 반대편에 부딪혔다가 그 반동으로 다시 돌아와 닫혀있었다. 저러다 주인아줌마와 주인집 딸이 쫓겨나면 어쩌나, 순이는 밤늦도록 걱정했다.

다음 날 아침, 순이가 일어났을 때 주인집 딸은 도시로 가고 없었다. 주인아줌마는 머리를 싸매고 누웠는지 점심나절이 되어도 안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이는 부엌 문턱에 걸터앉아 삶은 감자를 먹으며 안채 쪽을 살폈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갔던 주인아저씨가 돌아와 대문 안으로 들어서다 순이와 눈이 마주쳤다. 주인아저씨는 제법 둥글게 나오기 시작하는 순이의 배와 이빨 자국 난 식은 감자를 번갈아 흘긋 보더니 민망한 듯 고개를 휙 돌려 우물로 갔다. 순이는 남은 감자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저씨가 세수하는 물소리가 철썩철썩 마당 안으로 쏟아졌다.

그해 시월 순이는 예정보다 보름 일찍 첫딸을 낳았다. 막 태어나 눈도 뜨지 못한 딸을 보며 순이가 속삭였다. 꼭 학교에 보내줄게.

순이가 남편과 쉬엄쉬엄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 집 앞에 노을이 내려 능소화가 아침보다 더 붉었다.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니 이웃에게 옮겨 달라 부탁한 감자 두 자루가 먼저 집에 와 있었다. 순이가 감자 자루를 들어 옮기려 하자 순이 남편이 와서 감자자루를 잡았다. 순이가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무거운 걸 어쩌겠다는 거냐며 저리 물러나 있으라 하자 감자가 다칠까 걱정이 돼서 그렇다며 순이 남편이 배시시 웃었다. 순이는 남편을 보며 이이가 잔 실수에도 화를 버럭 내던 그 사람이 맞나 잠시 생각하다가 남편을 따라 배시시 웃었다. 함께 감자 두 자루를 광으로 옮기고 내일은 품을 사서 감자를 거둬들이기로 했다. 저녁뉴스엔 다행이 며칠 사이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없었다. 순이 남편은 몸이 고된지 저녁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다. 순이는 TV를 끄고 오늘 받은 책과 공책을 밥 상 위에 펼쳤다. 곧 다 읽고 쓸 수 있으니 걱정 말라며 책을 건네던 강사 얼굴이 떠올랐다. 꼭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니라며 강사가 공책에 써 준 글자는 순이 이름 중 마지막 글자였다. 강사는 자음과 모음을 하나씩 따로따로 공책 페이지 첫 칸에 쓰고 그 이름을 알려줬다. 순이는 낱글자를 공책에 눌러쓰며 반복해서 되뇌었다.

병원에 순이 남편이 입원해 있는 동안 간호사나 의사는 보호자를 자꾸 찾았다. 그때마다 순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간호사와 의사는 자꾸 자식 놈을 찾았고 둘째 아들이나 둘째 딸이 병원에 들를 수 있는 시간은 일을 마친 한밤중이었다. 순이 남편이 설사가 멈추지 않아 입원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뇌 MRI를 찍어야한다며 간호사가 순이에게 보호자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순이는 간호사에게 둘째 아들한테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지만 그날따라 바쁜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 통화가 된 둘째 아들이 밤늦게 병원에 들러 사인했다. 뇌 사진은 다음 날에야 찍을 수 있었다. 뇌 사진을 찍고 병원 복도를 걸어 병실로 돌아오며 순이는 결심했다. 집에 돌아가면 꼭 글을 배우러가야지. 병실로 돌아왔더니 순이네 옆자리에 새 환자가 들어와 있었다. 금발 머리의 키가 큰 젊은 남자 옆에 이름표를 목걸이처럼 건 직원이 따라와서 함께 있었다. 러시아에서 유학 온 학생인데 항문이 갑자기 너무 아파 응급실로 왔다가 입원했다고 했다. 같이 온 사람은 통역하는 병원 직원이었다. 직장 안에 급성 염증으로 인한 혹이 생겨서 절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금발 남자는 등을 대고 눕지 못 하고 엎드려 있거나 서 있었다. 서너 시간 뒤에 통역관이 다시 병실로 찾아왔다. 통역관은 간호사와 금발 남자를 번갈아 보며 통역을 했다. 간호사가 길게 설명했는데 통역관이 그보다 짧게 러시아어로 말을 전하거나 간호사가 짧게 설명했는데 좀 더 길게 말할 때도 있었다. 통역관은 이십 여 분 병실에 있다가 나가며 병실 커튼을 둘러쳤다. 순이는 금발 남자가 부러웠다. 모르는 것이 당당한 젊은 남자는 텔레비전에서 보는 사람 같았다. 순이도 병실 커튼을 쳤다. 정해진 길을 따라 드르륵 소리 내며 커튼이 닫혔다. 순이네 자리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커튼을 치고 커튼을 벽 삼아 기대야 했다. 등이 몹시 곤하고 아팠지만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커튼에 등을 기댈 수는 없었다. 순이가 손으로 커튼을 만졌다. 줄무늬 커튼이 부들부들했다. 물결처럼 흐르는 벽 안에서 순이는 바다를 떠올렸다.

순이네가 신접살림을 차렸던 읍내 감나무 집 행랑채에서 지금 동네로 이사 오기 전날이었다. 순이 남편은 어떻게든 읍내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 했지만 순이네가 결국 구한 집은 읍내에서 먼 산 밑 집이었다. 순이는 딸아이를 업고 부엌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그릇이 깨지지 않게 옷가지를 싸서 부뚜막에 차곡차곡 올려두고 행주로 찬장을 닦으려는데 딸아이가 칭얼댔다. 등에 업은 아이를 추켜올려 보았지만 아이는 계속 칭얼댔다. 싸다만 이삿짐을 그대로 둔 채 마당으로 나온 순이가 등에 업은 아이를 한 번 더 추켜올리고 주인집 마루 쪽으로 갔다. 주인집 시렁 위에 낯익은 책이 보였다. 주인집 딸이 자주 읽던 그 책이었다. 순이는 시렁에서 책을 꺼내 마루에 걸터앉았다. 순이가 손끝으로 표지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뼈만 남은 거대한 물고기가 작은 배 뒤에 묶인 채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림을 보는 순이 마음도 출렁거렸다. 순이는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다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후루룩 종이를 넘겼다.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순이가 책을 동그랗게 말아서 쥐고 부엌으로 왔다. 헝겊으로 단단히 싼 마음을 부뚜막에 쌓아놓은 그릇 사이에 깊숙이 넣었다. 순이는 심장소리가 차오르는 부엌에서 방금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순이가 숨을 헐떡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실 커튼 안이었다. 옆자리에선 스키로 끝나는 말과 한국말이 섞여서 들렸다. 커튼너머 옆자리엔 통역관이 다시 와 있었다. 순이는 읍내에 갈 때마다 든든했던 개똥 엄마가 보고 싶었다. 읍내에 가는 날이면 개똥 엄마 목소리가 평소보다 커졌다. 가게 간판을 일일이 가리키며 순이를 끌고 다녔다. 개똥 엄마가 앞장서면 순이는 그 길을 따라갔다.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개똥 엄마는 때가 되면 아이가 들어서는 순이를 은근히 시샘하는 듯 했지만 정작 순이는 몸도 마음도 가벼운 개똥 엄마가 부러웠다. 종일 주룩주룩 비가 내리던 어느 초여름 날, 순이네 부엌에 기름내가 가득했다. 순이와 개똥 엄마가 쟁반에 부추전을 담아 마루로 나왔다. 비가 오는 날은 논일도 밭일도 하기 어려우니 모처럼의 여유였다. 학교에 간 아이들이 돌아오려면 몇 시간 더 있어야 했다. 개똥 엄마가 손으로 부추전을 찢어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한 시간만 더 오다 멈추면 딱 인데, 이만하면 됐는데. 순이는 고무신에 고인 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그 위로 번져가는 물의 파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말여. 근데 세상일이 그런가. 순이가 고무신 안에 그득한 빗물을 쏟아버리며 말했다. 마당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순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툇마루에 누웠다. 빗소리가 우렁찼다. 이러다 논 걱정해야 하는 거 아녀? 개똥 엄마가 턱을 괴고 앉았다. 책이네. 순이가 누운 채 개똥 엄마를 올려다보니 개똥 엄마가 책을 들고 있었다. 어젯밤에 순이가 온 집안을 뒤져서 찾아낸 책을 개똥 엄마가 들고 있었다.

일 년에 한번씩은 TV에서 그 영화를 방영했다. 그때마다 순이 마음에는 철썩철썩 파도가 밀려들었다. 어젯밤 토요명화 시간에 또 영화가 방영되는 바람에, 그 바람에. 순이는 텔레비전에서 그 영화를 틀어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넘치도록 철썩거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순이는 온 밤을 구석구석 헤매고 다녔다. 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광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마당에 서서 이제는 그만하자, 생각하며 올려다 본 밤하늘에 구름 사이로 반쯤 몸을 숨긴 달이 보였다. 그래, 보이던 보이지 않던 달은 늘 뜨지. 그때 부엌 찬장 안으로 책을 밀어 넣던 날이 떠올랐다. 수북이 쌓아놓은 그릇 뒤에서 늙은 순이가 찾아낸 책은 색이 누랬다. 이제는 얼마만큼 더 누래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여기저기 삭은 마음이 순이 손에 들려있었다. 순이는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손바닥으로 오래 문댔다. 지금 그 책이 개똥 엄마 손에 들려 있었다. 순이는 책을 개똥 엄마 손에서 얼른 빼앗아 엉덩이 밑으로 숨기며 어젯밤에 미리 어딘가에 넣어두지 않은 걸 후회했다. 왜 그려? 개똥 엄마가 무안한 듯 퉁명스레 말했다. 오히려 더 무안해진 순이가 책을 꺼내 슬그머니 개똥 엄마 쪽으로 밀었다. 개똥 엄마가 책을 들고 표지 글자를 큰 소리로 읽었다. ‘노인과 바다’ 순이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비도 오는데 책 좀 읽어줘 봐. 개똥 엄마가 책장 넘기는 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책장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개똥 엄마가 탁 소리 나게 책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글자가 너무 작아서 못 읽겄다. 야학에서 한 달 배운 글공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고 개똥 엄마는 순이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글 좀 안다고 퉁기는 거여. 나도 이제 내용은 알어. 순이는 속으로만 말하며 한손으로 팔베개하고 벽에 기댔다. 비가 쉬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주민 센터 마당에 주차한 관광버스 지붕 위로 이른 아침햇살이 흐르고 있었다. 버스 앞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젊은 사람은 별로 없고 나이든 사람들이 더 많았다. 건강노래교실 수강생들이 모여서 누가 싸온 떡을 나눠 먹고 있었다. 순이는 낯익은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다문화한글교실 선생님이 반가워하며 순이에게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이름표에는 강좌이름과 수강생이름이 쓰여 있었다. 순이는 돌아서서 자신의 이름을 손으로 짚으며 읽어보았다. 이제 순이는 자기 이름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군청에서 제공한 버스는 크고 좋았다. 주민 센터 강좌 수강생이 합동소풍을 간다고 했을 때 순이는 남편을 두고 멀리 가도 될까, 젊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늙은 내가 끼어도 될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렇지만 소풍가는 곳이 바다라고 했을 때 순이는 꼭 가고 싶었다.

순이가 사는 곳은 바다와는 먼 곳이었다. 동쪽으로 가도 서쪽으로 가도 심지어 북쪽이나 남쪽으로 가도 바다로 가는 길은 멀었다. 언제부턴가 조금 살만해지면서 동네여자들이 마을부녀회 주관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했다. 순이는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에 하루짜리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바다로 여행가게 되었을 때 순이는 출발하기 전날 밤을 꼬박 샜다. 그렇지만 다음 날에 도착한 바다는 순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그날 바다엔 바람이 많이 불었다. 풍랑이 거세 입수가 금지된 바다로 몇몇 사람들이 들어가기도 했지만, 몇 발작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까지 부르르 떨며 물러나왔다. 마음으로 부드럽게 들어와 시린 가슴을 달래주리라 기대한 물결은 거칠었다. 파도는 커다란 숨소리를 내며 달려와서 툭 무게를 던져두고 내빼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성나게 출렁대는 바다를 보며 동네여자들이 바닷가 모래사장 바깥쪽에 돗자리를 폈다. 함께 온 일행들이 마을에서 가져온 음식을 펼칠 때 순이 마음은 펴지지 않고 꽁꽁 구겨지더니 작은 공만 해졌다.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병증을 일찍 발견한 경우라 약 먹고 관리를 잘 하면 증세가 나타나다는 걸 최대한 늦출 수 있다고 들었다. 둘째 딸이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해서 확인하고 당부했다. 젊어서부터 꼼꼼한 성격인 순이 남편은 매끼 약을 잘 챙겨 먹었다. 순이는 남편이 잔소리를 하면 병이 나은 것 같아 마음이 안정됐다. 그 이야기를 둘째 딸에게 하니 치매가 진행될수록 괴팍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며 증세를 잘 살피라고 말했다. 순이는 남편이 별일 아닌 일에 버럭 화를 내도 심란하고 그렇지 않아도 심란했다. 남편을 혼자 두고 소풍을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생각을 하는데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중국인 젊은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수업시간에 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더니 그예 못 온 모양이었다. 소풍날엔 주민 센터 놀이방에서 종일 아이를 돌봐준다고 했지만 아픈 아이를 맡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드디어 바다에 도착했다. 초여름 바다는 손님 맞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니 뜨거운 기운이 발바닥으로 올라와 가슴이 따스해졌다. 사람들이 바닷가 모래사장에 군청이름이 새겨진 천막을 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순이는 바닷가에 발자국을 찍으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파란 하늘 그리고 그 보다 더 파란 바다를 오래 서서 보던 순이가 마음속에서 구겨진 공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바다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바다 안쪽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검정 튜브에 의지해 바다에 떠 있는 사람들의 머리칼로 햇살이 쏟아졌다. 일행 중 몇몇이 물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순이는 바다 쪽으로 더 가까이 갔다. 물이 발가락에 닿자 시원했다. 그때 퍽 소리가 나며 순이 어깨로 뭔가가 날아왔다. 아이쿠 아이쿠, 순이 몸이 휘청거렸다. 젊은 여자가 뛰어오며 괜찮냐고 반복해서 물었다. 순이 발아래 비치볼 하나가 떨어져있었다. 순이는 공을 주워 여자에게 건네며 괜찮다고 말했다. 여자는 공을 받아들고 정말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갔다. 공놀이를 함께 하던 여자의 일행들이 멀리서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이는 모래사장을 걸어 나와 가게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횟집이 즐비한 시멘트 바닥에 고무대야를 갖다 놓고 장사를 하는 늙은 여자가 있었다. 순이는 멈춰 서서 고무대야 안을 들여다봤다. 늙은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남자와 흥정하고 있었다. 붉은 고무 통에 담긴 바닷물 속엔 제법 큰 물고기들이 꼬리지느러미를 분주히 흔들고 있었다. 아이가 물고기를 가리켰다. 늙은 여자가 고무 다라 안으로 손을 넣어 물고기 한 마리를 꺼내 나무도마 위에 올렸다. 힘줄이 툭툭 불거진 손으로 무쇠 칼을 들어 쏟아지는 햇살을 가르자 바다가 열렸다. 그 안에 내장과 함께 하얀 공이 드러났다. 젊은 남자가 아이에게 저게 부레야, 라고 말했다. 칼질을 하는 늙은 여자가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며 아이를 올려다봤다. 이걸 오므렸다 펼쳤다하며 헤엄치는 거야. 아이는 얼굴을 내밀어 하얀 바다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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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정 기자
남현정 기자 nhj@kyongbuk.com

사회 2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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