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동상

피나무 유령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층에 사는 장님 여자였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신경질적으로 흙을 튀기며 걷다가 멈춰 서서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유령이다!”

비명을 들은 이웃들은 여자가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관리소장이 여자를 아파트 안으로 끌고 들어가, 이웃에 피해를 주는 소란행위는 자제해 달라며 에둘러 방송할 때까지도 주민들은 유령에 대해 조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튿날 502호에 사는 대학생이 같은 자리에 못 박혀 혼잣말하는 여자를 발견했다. 학생은 여자가 정말 실성한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며 관리소장에게 여자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일주일째가 되던 날에 여자는 급기야 기묘한 주술까지 부리기 시작했다. 냄새 지독한 색색의 페인트를 통째로 늘어놓고, 제 허리께까지 들어 올린 뒤 흙으로 쏟아 붓는 것이었다.

“아줌마 뭐 해요?”

“보면 몰라? 유령한테 색을 입히는 중이잖아. 아직도 안 보이니?”

광포한 빛깔로 흙에 엉겨든 페인트 덩어리들만 보일 뿐이었다. 냄새가 심해 멀미가 날 정도였다. 여자의 만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매일 같은 자리에 신랄한 악취를 풍기는 온갖 찌꺼기들을 흩뿌렸다. 향수 몇 병을 깨뜨리고 간 것까지는 좋았다. 농염한 잔향보다도 색유리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 유리 조각을 주워 가서 부모의 걱정을 사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친 아이는 없었다. 숯불에 바비큐를 올려 굽는 일도 봐줄 만 했다. 어디에나 그러한 무뢰배는 있기 마련이었고, 다행히 여자는 수척한 잔불의 숨통까지 확실히 끊어놓고 돌아갔다. 그렇다 해도 쓰레기봉투에 피를 한가득 담아 와서 터뜨렸을 때에는 도무지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여자는 순대국밥 집에서 얻어온 돼지 피라고 했지만, 모를 일이었다. 끈적한 핏물은 빨간 색소와 초콜릿을 섞어 만든 가짜가 아니었다. 핏물이 밴 자리엔 한동안 파리 구더기가 들끓었고 502호 대학생은 엘리베이터에 여자를 쫓아내자는 취지의 탄원서를 붙였다. 관리소장은 주민들의 서명으로 빽빽해진 탄원서를 받아들고서 멍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쫓아내는 건 어려워요. 그래도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타일러 보겠습니다.”

희게 바랜 겹눈을 발견할 때마다 관리소장은 길을 막으려 했지만, 무슨 상관이냐며 날뛰는 여자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301호에 사는 시청 공무원의 제안으로 여자를 표적 삼는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밧줄 세 개를 이어 붙인 바리케이드는, 키에 따라 알맞은 공간을 찾아서 넘나들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앞을 보는 주민들은 다리를 들어 올리거나 허리를 숙여 쉽게 장애물을 통과했다. 장님 여자만이 적당한 출구를 가늠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밧줄을 쥐고 흔들며 용을 쓰던 여자는 결국 세 번째 밧줄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가고야 말았다. 입구멍을 바닥에 대고도 맵싸한 비명을 질러대는 여자를 발견한 이는 관리소장이었다. 관리소장은 구급차를 불러 부러진 다리를 배웅했다. 장님 여자 전용의 장애물은 치워졌고, 온갖 냄새가 뒤엉킨 흙은 위생상의 문제로 교체되었다. 한 움큼 베어 물린 땅에 말간 새 흙이 채워졌다. 우리는 장님 여자의 기행에 압사되었던 일상의 소음과 먼지를 되찾으리라 기대했다. 적어도 미친 여자가 퇴원하기 전까지는, 아파트 단지가 다시금 노릇하고 후박한 부엌 냄새, 주차장을 넘나드는 차 바퀴의 끼긱거리는 신음이나 아이들의 소란한 땀 냄새 따위로 달큼하게 젖어드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잘한 먼지보다도 먼저, 유령의 노래가 찾아들었다.

흐느낌을 처음 들은 이는 702호에 사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아파트 뒤쪽 정원, 그러니까 여자가 사달을 벌였던 곳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고 지껄여댔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예민한 예술가의 환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나치게 기민해진 예술가의 귀에 이명이 들리기도 한다는 믿음은, 그 분야에 무지한 일반인이 쉬이 가지는 통념이었다. 아이들은 달랐다. 401호 아줌마가 엘리베이터에 10살 먹은 아들을 데리고 탔을 때였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어김없이 기이한 노래 이야기를 했고 401호 아들은 카랑카랑 재잘댔다.

“나도 그 노래 알아요! 여기 사는 애들은 다 들었대요. 음, 타라, 그리고 아, 루우, 이런 소리 맞죠?”

얼멍덜멍한 콧노래에 악사는 게걸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401호 아줌마는 거짓말 하지 말라며 아들을 몰아붙였지만, 학부모 참관수업에 다녀온 이후부터는 껄껄한 얼굴로 노래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교실에서는 녹녹하고 맵싸한 그 음색이 유행가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래는 아이들의 몰랑한 입안에서 침과 함께 풀어져 달큼한 내음을 풍겼지만, 어딘가 나른하여 얼얼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선생님, 애들이 부르고 있는 저 노래 말이에요. 혹시 교과서에 나오는 건가요?”

“아뇨. 이상한 노래죠? 옆 반 애들도 틈만 나면 부른다더라고요. 저도 애들이 똑같은 노래만 부르는 게 이상해서요. 제가 모르는 아이돌 신곡이라도 되나 하고 물어봤더니 다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경우네 아파트 뒤에서 매일 들리는 노래라고요. 유령이 사는 아파트라고 말이에요. 참, 애들은 별난 구석이 있잖아요. 경우 어머니, 집에서 유령 본 적은 없으시겠죠?”

노련한 담임선생은 소박하게 웃으며 401호 아줌마를 덥혀놓으려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도 아줌마는 담임선생의 농담조를 되새기려 애썼다. 송골송골한 피부는 튿어지는 일 없이 문고리를 매끄럽게 잡아 내렸다. 반대편 손에 매달린 아들이 재재거리며 신발을 구겨 놓았다. 아이들의 노래에 관해서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다만 유령에 관한 소문이 계속 퍼진다면 관리실에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401호 아줌마는 장님 여자의 기행을 안쓰럽게 여겨 탄원서에 서명도 하지 않았지만, 근거 없는 악소문에 집값이 떨어지는 일마저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줌마는 안방 침대에 기대 누워 아파트 카페에 아파트 유령과 관련된 글이 올라 왔는지, 아파트 실거래가는 어떤지 검색하는 중이었다. 그때 그녀는 들었다. 색정적으로 느껴질 만큼 노곤하게 저민 어리광, 그악스러우리만치 질펀한 음률이 아파트 뒤편의 정원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아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투실하게 부푼 몸을 이기지 못하고 아줌마의 귀에까지 들러붙는 음색은 아이들의 달짜근한 침이 섞이지 않아 메말라 있었다.

“엄마, 엄마도 들려? 이 노래야! 유령 노래!”

관리소장은 햇빛 한 방울도 튀어 묻지 않은 눈가를 껄껄한 손가락으로 비비며 401호 아줌마와 마주했다. 그녀는 새벽동안 아파트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들이밀며 간밤의 유령 노래에 대해 말했다.

“정말 들었어요. 이상한 짐승이라도 들어온 건 아닌지.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죠. 확인 좀 해주세요.”

이후로 몇 주간 수척한 얼굴 몇 쌍이 더 찾아들었다. 소위 유령 노래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관리소장도 신랄하고 난삽한 음률을 몇 차례 들었다. 신고가 들어온 부근에 적외선 카메라까지 달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잡히지 않았다. 401호 아줌마가 새로운 건의사항을 가지고 관리실을 찾았을 때, 관리소장은 안쓰러우리만치 해쓱한 목소리로 답했다.

“냄새요? 소음이 아니라 냄새라고요?”

“네, 아저씨 죄송한데 좀 봐주셔야겠어요. 음식 쓰레기 냄새 같은 게 진동을 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또 거기입니까?”

“도로 쪽으로 난 창만 열면 괜찮더라고요. 아파트 뒤쪽 정원에서 나는 것 같아요.”

사나운 악취는 노래보다도 성급하게 아파트를 뒤덮었다. 장님 여자가 뿌려 놓은 돼지피의 잔해일지도 모른다는 건의에, 포클레인으로 무고한 흙을 되갈았지만 소용없었다. 바삭한 햇살마저도 끈적하게 기름진 악취를 구워내지는 못했다. 유령 노래에 잠 못 들던 사람들은, 낮 시간마저 갈취 당했다. 애연가인 203호 아저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담배에 눅진하게 절여진 코는 늙고 지쳐 장님 여자의 돼지 피 냄새도 맡지 못했다. 그런 남자조차 꿀렁이며 달라붙는 악취에 못 이겨 헛구역질을 해댔다. 불면증과 허기에 지친 사람들은 나날이 수척해졌다. 소음과 악취는 너무도 질펀하고 노골적이었기에, 어른들까지도 유령을 두려워했다. 햇빛에 바래지 않는 색점이 보일 즈음에는 모두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유령의 낙인은 401호 아들 경우의 턱 높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유령 조각을 처음 본 주민들은 햇빛에 눈이 다쳐 남은 잔상일 뿐이라 여겼다. 그러나 상흔은 같은 자리에 붙박여 누구에게나 비추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그 색깔을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수다를 떨며 지나가던 노인들은 같은 자리를 응시하다가 떨떠름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아이들은 유령의 흔적을 움켜쥐려 손을 휘휘 저었다. 유리구슬을 삼켜내듯, 왕성한 식욕으로 색점에 혀를 갖다 대는 아이도 있었다. 오동통하고 뜨끈한 살덩이와 부딪히면서도 색점은 묽어지는 일 없이 떫은 색의 농도를 유지했다. 색점은 유령의 노래나 냄새만큼이나 신랄하고 깔깔한 생김을 지니고 있었다. 입자는 파랗지도 붉지도 않았다. 주민들은 그 색을 다만, 유령의 색이라 칭할 수밖에 없었다. 색점은 엷게 저며져 비스듬히 누운 형태였다. 어떠한 두께도 없이 공중에 스며 있었지만, 결코 멀그스레 풀어지지 않는 단단한 태를 갖추고 있었다. 떫은 단면은 투명하지도 않았다. 투박한 색채를 고집스레 머금은 채 유령의 자리를 지켰다. 유령의 얼얼한 소리와 냄새, 색은 날이 갈수록 날카롭게 벼려졌다. 유령에게 잠과 식욕을 빼앗긴 주민들은 나날이 수척하고 껄껄해졌지만, 유령은 노골적일 정도로 그악스러운 흔적들로 주민들의 두께를 갈취하고 튼튼해졌다. 그러나 풍만했던 사람들의 살점을 훔쳐내고도, 유령은 기름진 먹이를 소화시키지 못했다. 뼈만 남아 단단해진 주민들만큼이나 유령은 선명해졌지만 그뿐이었다. 색점은 여전히 평평했고 유령은 살집도 온기도 지니지 못한 채, 사나운 흔적들만 탄탄하게 굳힐 뿐이었다. 포동포동하고 투실했던 주민들의 체온은 간 데 없이 스러져버린 것이다. 갈취의 참상으로 그득 찬 아파트는 갈수록 추워졌다. 살집을 잃은 주민들은 외투를 몇 벌씩 걸치고서도 몸을 떨어댔다. 느닷없이 서러운 울음을 흘리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유령 퇴치 명목의 주민 회의는 이례적으로 바글거렸다.

“101호 살던 여자 말이에요. 왜 뒷마당에서 넘어져가지고 입원했다는.”

“그러고 보니 그 분이 유령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경우야, 말해 봐. 네가 그 아줌마한테 뭐 하냐고 물어봤더니, 유령한테 색을 입히는 중이라나? 뭐라고 했다며.”

“맞아, 그 아줌마 맨날 유령이랑 색 입히기 놀이 하는 거라 했어.”

“그러니까 그 여자는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녜요? 혹시 몰라. 유령도 101호 여자가 불러 왔을지.”

“세상에, 그 여자가 피까지 부었던 것 기억해요? 나는 그냥 불쌍한 처녀가 미쳐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지. 그게 설마 유령 부르는 제사 이런 건 아녔나 몰라. 어머, 혹시 저주 아니야, 저주?”

“팥이라도 뿌려 볼까요?”

“팥도 뿌리고 소금도 뿌려 봤어요. 203호 아저씨는 무당도 불러서 제까지 지냈잖아. 맞죠, 아저씨?”

“거, 무당이 양놈 귀신이면 다 소용 없다고 하더라고. 내가 요상한 소리랑 냄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해서 십 키로가 빠졌다 이 말이오. 오죽하면 백만 원이나 복비로 주고 용한 무당 찾아 데려왔겠어. 자기 피로 부적까지 그려서 묻어놓고 갔는데. 자, 고 빌어먹을 냄새는 아직도 진동을 하잖아.”

“서양 귀신이었으면 진즉 없어졌겠죠. 여기 목사님도 계신데.”

“어쨌든 여기서 탁상공론 해봐야 더 나올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일단 101호 아줌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쪽에 연락을 해 봅시다. 관리소장님이 구급차를 불렀다고 했으니까, 내일 제가 관리실에 가서 병원 주소랑 연락처를 받아 오죠. 병원에 같이 가 보실 분 있습니까?”

동장과 502호 대학생, 301호 공무원이 이튿날 토요일에 병원에 다녀왔지만, 장님 여자는 이미 퇴원한 뒤였다. 101호 초인종 소리에 답하는 기척은 없었다. 102호 이웃은 옆집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불은 늘 꺼져 있었기에 어두운 현관만으로는 여자의 부재를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현관문 여닫는 소리나 티브이 소리 따위는 여자가 입원한 이후로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욕실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나 샤워기 돌아가는 소리라도 새들기 마련이거든요. 요 몇 주는 전혀 못 들었어요.”



장님 여자가 유령을 찾은 것은 냉랭한 냄새 때문이었다. 신랄한 냉기가 구부러뜨린 철쭉 내음이 시린 기억을 흘리며 시들어가고 있었다. 서러운 냄새로 일그러진 공간에는 체온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주변의 향취들을 썩지 않는 냉기로 감염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열 없는 갈증에 붙는 이름을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유령이었다.

“여자야, 나를 찾은 여자야. 네가 나를 볼 수 없듯 나도 너를 볼 수 없단다. 더 가까이 오지 않으련. 너무 춥구나.”

여자는 구부러진 찬내를 끌어안았다. 흡혈까지 각오했으나, 유령은 여자의 온기만을 짓씹을 뿐 피는 마시지 못했다. 여자의 두툼한 살갗이 뜨뜻한 핏물을 추위 속에서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여자는 유령을 둘러 안은 팔에 체온을 얽어냈다.

“어때, 좀 따뜻해지는 것 같니? 네가 앞을 못 보는 건 나랑은 다른 이유 때문이야. 색이 없기 때문에 망막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 거지. 색을 입으려면 우선 열을 가져야 한단다. 체온을 가진 것들만이 빛을 두를 수 있거든.”

유령은 여전히 춥다고 말했다. 유령은 열보다도 우선 냄새를 입고 싶다 속삭였다. 진한 냄새는 열기 속에서 피어오르기에 여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이 철쭉들의 향내를 모조리 꺾어놓기 전에, 여자는 지독한 냄새 찌꺼기를 모아왔다. 뜨끈한 돼지의 피로 유령을 적셨을 때, 유령은 몸을 조금 떨었다.

“그래, 그렇게 떠는 거야. 열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면 네 빛깔도 냄새도 가질 수 있어. 몸을 제대로 떨려면 노래를 불러야 돼. 자, 나를 따라 소리 내봐.”

체온을 삼켜낼 음률을 가르쳐주기도 전에 여자는 응급실로 추방당했다. 덜걱이는 다리로 돌아왔을 때, 여자는 끼익, 빈약한 파동 한 자락을 들었다. 성대를 떨어내는 노래를 배우지 못한 유령은 편법을 익혔다. 열 없이 눈을 꿰뚫는 레이저의 발광법을 터득한 것이다. 유령은 여자에게 제가 찾은 소리와 냄새, 색을 자랑하며 고맙다고 재재댔다. 유령은 여전히 찼고, 춤추는 법도 알지 못했다. 풍부한 화성의 울림 대신 냉랭한 가짜 빛깔을 갈취해낸 유령의 목소리는 곧고 얇았다. 전율하지 못하는 인공의 파장은 제 빛마저도 얼렸다. 빙결된 목소리는 노래가 되지 못하고 철쭉의 체온을 썩지 않을 냄새로 꺾어 놓았다. 시린 팔뚝을 비비는 손이 거칠하고 서러웠다.

“그만 먹어. 너는 열을 소화시키는 법도 배우지 못했잖니. 아직도 춥지?”

“그래, 여자야. 나는 색도 냄새도 목소리도 찾았어.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있듯, 이제 나도 너를 볼 수 있단다. 그런데도 아직 추워.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

냉기로 얼어붙은 밤하늘에 오리온자리가 붙박여 있었다. 여자는 버들버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흰 별 뭉치를 가리켰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저 별들을 보고 있어. 찬 하늘에서도 빛나는 기억들은 그만큼 뜨거운 체온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 몸을 떠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야. 아직 너는 제대로 열을 삼키는 법을 모르지만, 저렇게나 뜨거운 별들은 장님에게도 또렷이 느껴질 정도니까. 너도 몸을 좀 덥힐 수 있을 거란다.”

여자가 떠난 뒤에도 유령은 오리온자리를 지켜보았다. 뾰족한 색점을 찡긋거리며 푼푼하게 얽힌 화음을 쥐어 보려 애썼다. 별들의 떨림은 너무도 정교하게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유령은 음성 한 자락을 분리해내고자 했지만 이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별자리의 풍성한 합주는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한 유령까지도 둥둥 울려대었다. 별의 춤은 곧 윤기 나는 노래로 반짝이며 흘렀다. 기름진 노래를 따라 부를 피륙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유령은 별의 떨림이 만드는 따끈한 온기 속에서 난삽한 추위와 갈증을 달랬다. 얼어붙은 하늘에서도 달게 녹아 빛나는 별들을 닮고 싶었다. 먼 별의 녹녹한 온기를 쬐며, 유령은 뜨겁게 끓어 흰 빛을 뿌리는 제 노래를 상상했다. 언 몸을 녹일 피가 필요했다. 핏물로 그득 찬 혀가 필요했다. 한 줄 현의 얼음 악기로 유령은 시리게 울었다. 먼 별의 온기는 색점을 녹이기에 충분치 못했다. 얼어붙은 유령은 눈물 없이 울어야 했다.



서럽고 허기진 아이들은 싱거운 침방울을 매달고 소리질렀다. 유령의 갈라진 비명에 길들여진 어른들은 미끈한 울음을 자꾸만 놓쳤다. 부모들이 입맛을 잃자 아이들도 배를 곯아야 했다. 아파트는 여전히 추웠다. 깔쭉 피어오르던 철쭉들은 향을 빼앗긴 채 말라 죽었고, 빙결된 하늘에는 다시 겨울별이 떴다. 203호 아저씨가 불렀던 무당이 다시 찾아왔을 때, 청중은 수십 배로 늘어 있었다. 목사마저도 흔쾌히 복비를 나누어 냈을 정도였다.

“어이구, 이거 내가 아니라 보살님이 오셔야겠군, 그래.”

“예? 그럼 무당님도 귀신을 못 쫓아내겠다, 이 말입니까?”

“아니, 저희가 복비도 두둑이 챙겨드렸는데. 그러지 마시고 잘 좀 봐주세요.”

“저렇게 독헌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바리보살님이라도 온다면 모를까. 벌써 지가 산 것이라도 되는 양 활개를 치잖나. 저 요상헌 색은 또 뭐냔 말여. 암 것도 못 보는 망자면 몰러도 저렇게 냄새까지 풍기면서 붙박여 있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요망한 끈을 저러코롬 끈덕지게 붙잡고 있는디 내가 어쩌란 말인가. 바리보살님이 직접 오셔갖고 제를 지내주거나, 보살님처럼 숨살이 꽃이라도 가져 와서 진짜 사람 맹글어 주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어. 이까짓 돈 몇 푼으로 쫓아버릴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여.”

“무당님 잘 좀 봐주십쇼. 저 귀신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있어요. 그래, 애들은 또 어떻고요. 몇 날 며칠을 어찌나 서럽게 울어대던지.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데요. 지금 이 사람들 죄다 귀신 되게 생겼다니까요.”

“바리공덕 할미가 와도 어쩌지 못헐 일을 나 보다 어쩌란 말여. 생귀신 수백 놈 생길 지경이 되면 바리보살님이 직접 오실지도 모를 일이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녀. 자네들이 숨살이꽃, 허더 못해 피살이꽃이라도 직접 가져올텐가. 귀신놈도 피가 돌면 떠떳해 질 걸. 그게 아니면 애 하나라도 잡아서 고아 멕여. 그럼 추위는 가실 걸세.”

“아니 애를 잡으라고? 이 미친 할망구가 뭐라는 거야?”

“더 들을 필요도 없어. 됐으니까 당장 나가라 그래요.”

“그래, 사람이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거요. 귀신 잡으라고 불렀더니 산 사람을 잡으라는 게 무슨 망발입니까.”

“복비도 다시 내 놓고 가요. 으휴,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미친 게 다 난리네.”



흙 묻은 치마가 발목에 감겨 장님 여자는 몇 번이고 넘어졌다. 두툼했던 뱃살이 꺼져 치맛단이 자꾸만 너저분하게 흘러내렸다. 도중에 지팡이를 잃어버린 탓에, 여자는 직녀성의 엷게 새는 음성만을 쫓아 나아가야 했다. 새로 뜬 북극성의 굵은 노래가 보드라운 목소리를 짓뭉개는 탓에 여자는 여러 갈래로 핏물을 쪼개어 귀를 감쌌다. 세밀한 핏줄에 걸러진 사근사근한 소릿결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절벽에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은 숫제 천운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산스런 낮에는 귓전의 핏물을 아무리 가늘게 갈라도 고아한 소리를 집어낼 수 없었다. 와글와글한 빛깔들에 모든 소리가 어지러이 흩어질 때에는 가만히 누운 채로 설익어 달뜬 먼지들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버글대던 소음이 녹아들면 그제야 여자는 다시 걸어갔다. 나긋한 직녀성의 노래는 나날이 세차게 부풀고 있었다. 옛 성배에서 새는 따끈한 물길이 여자에게 스며들었다. 희고 포근한 젖 내음은 오랜 등정에 앙상해진 여자를 살찌웠다. 다시금 올라붙은 치마 속에서 단내 나는 핏물이 흘렀다. 고소하게 뭉친 거품을 산짐승들이 게걸스레 핥아댔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분홍빛의 거품이 옛 별의 달짜근한 오줌으로 온통 노오랗게 물들 무렵이 되어서야 여자는 발을 붙이고 고개를 들었다. 흰 막으로 바랜 눈을 열고 혀를 넓게 빼었다. 밀감 먹은 고왕의 오줌발이 홍수처럼 흘러들어왔다. 대만물상의 꼭짓점까지 여자를 쫓아온 들개가 따끈하게 열 오른 여자의 다리 한 쪽에 이를 박았다. 기브스 안쪽의 질긴 살갗에 바람 구멍이 생겼다. 들개는 누런 오줌보에 젖어든 피거품을 삼키며 숨을 불었다. 코코펠리의 피리 연주가 빈 다리뼈 구멍으로 쉭쉭 퍼져 나갔다. 고통에 못 이겨 다릿대를 넘기고 도망치려는 여자를 직녀성의 종용한 온기가 붙들었다. 달달한 내음에 녹아버린 여자는 흐늘대는 팔만을 덧없이 퍼덕였다. 녹녹한 날갯짓이 코코펠리 음악을 흩뿌렸다. 콧잔등에 달라붙은 소리 먼지에 여자가 재채기를 했다. 먼지는 녹신하게 젖어 피리의 박자로 울었다. 온 얼굴이 몽글한 가루로 뒤덮였다. 여자를 휘감은 피리 소리가 몸을 비비며 뜨끈한 체온을 배설했다. 다릿살이 너덜하게 뜯겨나간 자리에 들개가 불어넣은 드센 숨은 옛 신의 피리 소리가 되어 풍류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여자는 흐무러질 듯 푸진 단내를 게걸스레 삼켜내었다. 들개 역시 제가 불어내는 달짜근한 떨림에 한껏 취해 구멍 사이로 새어 나오는 피거품을 헐떡대며 빨았다. 오래도록 굶주린 여자에게 맛깔스레 녹신한 피리 노래는 황홀하리만치 갑작스러웠다. 온 몸이 저려와 여자는 떨림보다도 빠르게 고소한 입자를 짓씹었다. 춤사위에 배어드는 진한 체액에 들개가 부르르 경련했다. 후박한 단기에 여자의 온 피부가 젖어들어 직녀성보다도 끈적한 윤기를 흘렸다. 소리 입자들은 벌거벗은 몸을 비비며 얼얼하리만치 달콤한 향과 열기를 뱉었다. 들개는 다리 구멍에서 한 조각의 떨림이라도 새어나갈까 두려운 듯 더욱 빠른 속도로 다리를 훑으며 피리 소리를 불어냈다. 직녀성은 코코펠리의 알몸이 얼어붙지 않도록 사근한 온기를 둥글게 덮어 주었다. 코코펠리 음악의 춤사위는 여자와 개를 발갛게 달뜬 우윳빛의 입자로 남김없이 감쌌다. 헐떡대며 교접하던 소리 먼지들은 서로의 열과 냄새를 입고 느긋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여자는 한층 보드라워진 들개의 침을 맨 다리에 입었다. 어느새 여자의 입가에도 분홍빛의 거품이 몽글몽글 솟아 나오고 있었다. 갈증을 쫓아낸 악기들은 직녀성에서 흐르는 오줌살의 지휘를 따라 2악장으로 넘어갔다. 더 이상 바삭한 소리 먼지들을 깨물어 삼키지 않아도, 여자와 들개는 피리 음악과 같은 춤을 출 수 있었다. 공명하는 먼지들은 균질한 체온으로 달아올랐고, 같은 열을 입은 악기들은 한 결의 분홍빛을 뿜어냈다. 장님 여자는 제 안에 심긴 들개의 피거품과 날 균들을 느낄 수 있었다. 병원식으로 먹었던 계란말이에는 양파가 들어 있었다. 핏속의 맵싸한 단내까지 삼킨 들개는 눈이 멀었다. 광견의 포자를 들이킨 여자는 더 이상 색 없는 물에 몸을 씻어낼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여자와 들개는 분홍빛 향연 속에서 나른한 신음을 흘려보냈다. 코코펠리가 심어낸 낯선 균들 중에는 여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꽃씨도 섞여 있었다. 여자의 자궁에 자리 잡은 꽃씨는 직녀성의 따끈한 오줌물을 들이키며 토실하게 부풀어 올랐다. 여자의 다리뼈에서 새는 피리 음악은 영양가 넘치는 모유가 되어 씨앗을 포동하게 살찌웠다. 여자는 분홍빛의 노글노글한 거품까지도 씨앗에게 불어넣었다. 직녀성 오줌의 밀감 내음이 짙어지고, 씨앗마저도 여릿한 체온을 입고서 함께 노래하게 되자, 여름 합창의 마지막 악장을 생일로 하는 꽃이 피어났다. 피살이꽃은 장님 여자의 자궁 밑동에 단단히 뿌리박고 자랐다. 고소한 피거품을 토양 삼아 자라난 꽃은 보드라운 향내로 여자의 위장까지 간질였다. 달가운 허기에 장님 여자는 싱긋 웃음 짓고 피부에 남은 직녀성과 코코펠리 음악의 단즙을 기꺼이 자궁으로 흘려보냈다. 끈적하게 녹아내린 잔향이 피살이꽃의 줄기 속에서 발간 핏물로 달아올랐다. 코코펠리와의 정사가 끝난 뒤, 장님이 된 들개는 잠이 들었지만, 장님 여자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녹신하게 차오른 잠기운마저도 짜내어 피살이꽃에게 먹이면서, 여자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여자의 뒷목에는 희멀건 햇빛이 들러붙었고, 직녀성은 푸짐한 햇살 뒤편에 보드라운 온기를 숨겼다. 아직 마르지 않은 분홍 거품 자국에서는 코코펠리의 사랑 노래가 향연의 잔열에 들떠 재재대고 있었다. 뭉글뭉글 덩이진 피거품을 베어 물고 피살이꽃은 더욱 붉게 자라났다. 귀향길은 직녀성을 쫓아 올랐던 여정보다 훨씬 수월했다. 들개 이빨에 헤집어진 다리뼈에는 누런 고름이 생겼지만, 피살이꽃의 향취에 이끌린 햇빛이 스며 얼어붙지는 않았다. 장님 여자는 유연한 걸음으로 오리온자리의 흰 울음을 쫓아 나아갔다. 퍼렇게 빙결된 겨울 하늘 조각은 유령을 가리키는 이정표였다. 얼어버린 옛 성배의 길을 오리온의 성좌만이 꿋꿋이 떠받들고 있었다. 시린 하늘의 등뼈는 햇빛조차 녹여내지 못한 겨울 천장의 한가운데 인박혀 있었다. 서러운 휘파람의 소릿길을 따라, 여자는 피살이꽃을 품고 나아갔다.



“엄마, 맛있는 냄새 나.”

싱그럽게 터져 흐르는 밀감 내음에 401호 아줌마는 단 침을 꼴깍였다. 귀신 들린 계절은 드디어 겨울 과일까지 길러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유령의 신랄한 악취는 어찌된 일인지 자취를 감추었다. 콧구멍에 늘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냄새 반죽이 말끔히 녹아 있었다. 말간 콧물을 훔쳐내자 맛깔스런 밀감 냄새가 살랑이며 새어들었다.

“300동 주민 분들께 안내방송 드립니다. 근래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들과 관련하여 비상주민회의를 열고자 합니다. 시급한 사안이오니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의 장소는 아파트 제 2놀이터이며, 참석 시 식기류를 필히 지참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주민 여러분의 건강과 생활에 직결된 매우 시급한 사안이오니만큼 가능한 빨리 집결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401호 아줌마는 배가 고프다며 보채는 경우를 이끌고 유령의 성채로 향했다. 시큼하게 익은 겨울 과일의 햇살 내음이 콧길을 지나 혓바닥을 깔쭉하게 긁어내렸다. 모자는 말간 침을 다시금 꼴깍 삼켰다.



“아니, 아주머니,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안 그래도 요전번에 동장님이랑 3층 사는 공무원 청년이랑, 그래 지난번에 탄원서 써 붙였던 대학생 알죠? 다 아주머니 찾으러 병문안까지 갔었는데. 대학생 청년은 전번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에요. 아주머니 만나서 꼭 좀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아주머니 정말 어딜 갔다 오시는 겁니까? 퇴원하고 집에도 안 들어오셨죠?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머니를 어디 딴 데로 보내려는 것도 아니고 수술까지 하고 오신 분께 해코지라도 하겠습니까. 이웃 간에 이대로 지내는 것도 껄끄러우니까 다들 사과도 하고 이야기 좀 나누고 싶다는 건데. 그렇게 말도 않고 쌩하니 없어지는 것도 도리는 아니죠.”

“유령은, 유령은 어떻게 됐나요?”

열에 취해 쏘아붙이던 관리소장은 그제야 비릿하게 달뜬 여자의 냄새를 맡아내었다. 여자는 시뻘건 얼룩과 흙탕물이 말라붙어 숫제 넝마가 된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원피스의 한 쪽 밑단이 너덜하게 찢겨 허벅지 위까지 훤히 드러났다. 흙먼지에 새까매진 환부 사이로 흰 다리뼈 조각이 내비쳤다. 해진 천 조각 밑에 발간 핏물이 들쩍지근한 비린내로 고여 들고 있었다. 관리소장은 귓바퀴 근육을 팽팽하게 조이며 목을 떨었다.

“저희도 그 유, 유령 문제로 말씀 드릴 것이 있었는데. 주민 분들이 유령 때문에 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 돼서 말입니다. 혹시 뭐 아시는 게 없나 여쭈어 보려고 했죠.”

여자가 싱긋 미소 지었지만 눈을 내리깐 관리소장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희게 새어버린 눈을 태연하게 깜박이며 장님 여자는 지친 남자를 일으켰다.

“유령을 살찌울 준비가 됐어요. 이제 그 애도 다른 열을 훔치지는 않을 거예요. 주민들을 불러 주시면 제가 만찬을 대접하고 싶은데. 그걸 먹으면 추위도 싹 가실 거예요. 허기도 채울 수 있을 테고요.”



아이들은 온종일 마녀의 만찬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유령 아파트에 사는 경우는 재재대는 친구들 한가운데에서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토실하게 살이 오른 배를 두드리며 젠체하는 소년을 아이들이 안달하며 재촉하였다.

“봤지? 여기에 마녀가 키운 유령이 들어가 있다니까. 내가 유령을 잡아먹었다고, 유령을.”

“유령은 투명한데 어떻게 잡아먹냐? 자세히 좀 얘기 해 봐. 근데 너 얼굴 되게 빨갛다. 3반에 승준이도 그렇던데. 혹시 마녀가 술도 줬냐?”

“아씨, 술은 무슨 술이야. 궁금하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잘 들으라고. 니들 피살이꽃이라고 들어 봤냐? 그걸 먹이니까 유령이 갑자기 나무로 변한거야. 거기서 되게 달고 이상한 과일이 달렸는데 그게 다 유령 눈알이랑 살이랑 이빨이랑 섞인 거지. 내가 그걸 한입에 먹었단 말씀 아니겠어?”

“우웩. 드러워.”

“더 지저분한 거 알려줄까? 마녀가 피살이꽃을 어디서 꺼냈는지 아냐?”

경우가 소곤대자 아이들은 킬킬거리며 자지러졌다.



401호 아줌마는 플라스틱 도시락 통과 수저를 하릴없이 달각거리다 승준 엄마와 서먹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요즘 들어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며칠 전에는 머리 한 구석이 지독히도 시려 이웃의 열 없이 희멀건 얼굴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승준이 유령 부르는 노래를 지어내 이 사달이 난 것 아니냐고 쏘아붙이자, 이웃은 그제야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를 떴다. 오늘 승준 엄마는 그때보다도 더 발간 낯빛을 하고 있었다. 몰캉한 밀감 내음에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웅웅댔다. 어색했던 이웃들은 뱃소리로 서로에게 화답하며 장님 여자의 의식을 지켜보았다. 여자는 유령의 찬 색점 바로 밑에 손을 집어넣고 녹신한 목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밀감의 단내는 그녀의 신음에서 퍼져 나오는 것이었다. 여자가 둥글게 두른 손을 토닥이며 피리 소리 같은 노래를 부르자, 끌어안긴 유령이 화답하듯 붕붕거렸다. 훈기에 흐무러진 밀감 내음이 더욱 질펀해졌다. 그녀를 빙 둘러싼 주민들까지 발그레 녹아들자 여자는 별안간 한 팔을 내리더니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고 시뻘건 꽃 한 송이를 뽑아내었다. 401호 아줌마는 서둘러 경우의 눈을 감쌌다.

“저거 오줌 누는 데서 꺼낸 거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견고한 노래 사이로 섞여들었다. 여자는 막 출산한 꽃을 유령의 색점보다 한 뼘 정도 아래에 가져다 놓고 둥글게 문질렀다. 벌건 꽃잎이 뭉개지며 분홍빛 피거품으로 풀렸다. 갓난 거품은 뭉게뭉게 한껏 부풀다가 몽글거리는 핏물로 뭉쳐 가라앉았다. 피살이꽃이 가벼워질수록 핏물은 진하게 고여 차올랐다. 뿌리까지 녹아들 무렵이 되자, 유령은 나무 한 그루만큼의 체온으로 온통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시큰한 색점과 악취마저도 단 핏물에 끓어 스러졌다. 갓난 꽃의 숨을 모조리 삼켜낸 유령은 피나무가 되었다. 차진 단내는 토실한 겨울 열매로 자라 피나무 유령의 마른 손목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주민들은 밀감 내음이 녹진하게 뭉친 과일들을 안달하며 바라보았다. 식기를 단단히 움켜쥔 손들은 여자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오래 기다리셨죠. 마음껏 드세요. 양이 모자라지는 않을 거예요.”

왕성하게 솟아나는 타액에 숨이 달아 헐떡대던 사람들은 단즙을 게걸스레 들이켰다. 수척했던 혓바늘들이 통통하게 달아올랐다. 직녀성과 코코펠리의 밤 축제, 그 단 숨의 기억이 발간 입들 속에서 농염하게 무르익었다. 별과 신의 관능적인 분내에 사람들은 온통 분홍빛으로 영글었다. 이웃들은 서로 입을 맞추어 달뜬 숨을 주고받으며 여자의 향연을 만끽했다. 여자가 잉태하여 길러낸 열매로 주민들은 허겁지겁 배를 불렸다. 유령의 핏물로 녹아든 별의 숨은 두툼하게 부풀어 사람들을 살찌웠다. 수척하게 그늘졌던 뱃가죽들이 유령의 체온을 삼켜내고 둥근 윤기를 빛내었다. 살 오른 사람들은 한층 무거워졌고 경우는 조금 더 긴 다리뼈를 갖게 되었다.



“치사하게 혼자서만 다 먹었냐? 하나 정도는 남겨 왔어야지.”

“그날 뿌리까지 다 고아 먹었어. 얼마나 달았는데. 그리고 니들은 겁쟁이라 먹지도 못했을 거잖아. 마녀가 꽃을 어디서 꺼냈게?”

“으욱. 알았다고. 그만해, 그만.”

경우는 키득거리며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들었다. 자그마한 팔에 멱을 잡힌 말간 물이 이리 저리 출렁였다. 철럭거리는 물은 순식간에 경우의 눈을 그득 채웠다. 경우는 허우적거리며 기도까지 부풀어 오른 물거품을 게워냈다. 다리뼈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말간 물 대신 단물만 삼키는 주민들 틈에서 장님 여자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광견의 씨앗으로 병든 이웃들은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며 단내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멸균된 생수 대신 우유를 들이켰고, 흙에 스민 피나무 과즙에는 벌레들이 들끓었다. 파리와 나비, 모기와 벌들이 늘펀하게 살 오른 주민들의 피부에 달라붙었지만, 축제의 잔열이 남은 무덤을 갈아엎자고 주장하는 이웃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여름, 얼어 있던 오리온자리의 눈물은 끈적하게 녹아 흘렀고, 장마 내내 진해져가는 단내를 쫓아 벌레들이 가쁘게 웅웅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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