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백성이 임금에게 민의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 있었다. 글을 아는 사람은 ‘상언’을 통해, 글을 모르는 사람은 징이나 꽹과리를 치는 ‘격쟁’을 통해 백성들의 고충을 왕에게 알렸다. 정조는 탑골에서 북촌으로 올라가는 길인 통운교와 경복궁 앞에 놓인 혜정교, 창덕궁의 돈화문 밖에 있는 파자교 등 세 곳에 상언과 격쟁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곳은 서울에서도 백성들의 통행량이 많고 어가가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겠어. 정약용이 정도면 몰라도…” 정조는 백성의 소리를 듣는 과정을 통해 자신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조선을 꿈꾸었다. 1784년 3월 20일 정조는 창덕궁 선정문 넓은 마당에 일반인들과 종로 상인을 대거 초청, ‘백성과의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상인들과 매년 만나 토론하던 정조는 이 해 특별히 많은 일반 백성들을 대궐에 초청, 경제개혁을 위한 토론회를 가졌다.

일반 백성들은 흉년으로 매년 힘들다며 나라에서 구휼에 힘써달라고 요구했다. “대개 10년에 9년은 흉년이다. 근본적인 방책을 모색하라. 그리고 나라의 창고와 내탕고를 다 개방해 농민들을 구제하라” 즉석에서 어명을 내렸다. “부유한 상인들이 상점을 독점, 상점을 내고 싶어도 종로거리 어디에도 자리가 없습니다.” 소상공인들의 하소연을 들은 정조는 “소상공인들의 창업을 위해 나라에서 10만 냥을 마련, 직접 대출해 줘라”고 지시했다.

“공인(나라의 공공물건을 납품하는 거상)과 소상공인 모두 우리 백성이다. 그런데 나라에서 푼 돈이 위에서만 돌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 소상공인이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은 임금의 뜻이 밑으로 전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면서 이번 나라에서 하는 대출은 무이자로 하라고 했다.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할 수 있다.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말로 정조는 ‘백성들과의 대화’를 마무리 했다.

같은 편에서 ‘도떼기 시장’같다는 혹평이 나온 ‘대통령 국민과의 대화’는 “임기 절반 동안 올바른 방향을 설정했고, 성과가 드러나고 있다”는 대통령의 자화자찬식 마무리 발언을 면목없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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