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황의 지위는 막강했다. 교황의 힘은 각국 왕들의 권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교황과 왕이 함께 동행할 때는 교황은 말을 타고, 왕은 걸어야 했다. 접견할 때도 교황은 자리에 앉아서, 왕은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세와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고위 성직자에 대한 서임권(敍任權)을 두고 갈등, 서로 한발도 물러지지 않았다. 하인리히4세는 로마교회의 통제권에서 벗어나려 했고, 교황은 하인리히 4세의 모든 자주권을 빼앗으려 해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먼저 반기를 든 하인리히4세는 독일의 모든 주교들을 소집, 그레고리7세의 교황 지위를 박탈한다고 선포했다. 교황은 이에 맞받아 전체 기독교회의를 소집, 하인리히4세의 파문을 결정했다. 독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까지 하인리히4세를 반대하는 대열에 합류, 교황의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쫓겨날 판이 된 하인리히4세는 달랑 두 명의 수종만 데리고 당나귀를 타고 천 리 밖에 떨어진 로마를 찾아갔지만 교황은 하인리히4세를 따돌리기 위해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카노사궁에 가 있었다. 혹한의 눈보라를 헤치고 카노사를 찾아갔지만 교황은 궁 문을 굳게 잠그고 하인리히4세를 만나주지 않았다.

하인리히4세는 눈이 내리고 얼어 붙은 땅에 무릎을 꿇고 궁 문 앞에서 용서를 빌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몇 날 며칠을 무릎을 꿇은 채 빌고 또 빌었다. 그제야 궁 문을 연 교황은 하인리히4세를 용서하고, 교적을 회복시켰다.

독일로 돌아온 하인리히4세는 내정을 정비, 통치기반을 다진 후 교황에 대한 설욕을 다짐했다. 독일 군사들이 로마에 들이닥치자 그레고리7세는 교황청을 버리고 도망쳤다. 결국 그는 도망자 신세로 타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인리히4세가 눈보라 속에서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던 ‘카노사의 굴욕’을 갚아줄 수 있었던 것은 극한 상황을 이겨낸 인고의 승리였다. 하인리히4세의 설욕은 왕위를 빼앗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굴욕을 감내한 승부수의 결실이다.

리더십의 위기에 “고통마저 소중하다”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단식에 승부수를 던졌다. 영하의 추위 속에 8일간 극한의 고통을 견딘 황교안의 야외단식 결실을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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