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넘어
누군가 저녁의 고삐를 끌고 마을로 내려온다

새들은 공중의 지도를 따라 날아가고
산자락에서 늙은 똘감나무는 늦볕을 목에 두르고 서 있다

사방으로 번지는 소리 없는 기운에
능선의 긴 꼬리가 검은 빛으로 물들고
앞산의 등줄기가 아득해지고

밭두렁에 뒹굴던 흙 묻은 신발짝도, 뿌리째 뽑혀 풀이 죽은 달개비꽃도
저녁의 품으로 들어갔다

밀려가고, 밀려오는 이 거대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무덤 속에 고인 어둠이 일제히
무덤 밖으로 나오는 시간,

망연히 저편을 바라보며 저무는 일도, 모두 저 걸음이다




<감상> 한 마리 소처럼 누군가 저녁의 고삐를 끌고 마을로 내려오면 능선의 꼬리까지 검은빛으로 물든다. 고단했던 하루도, 아름다운 꽃들도 저녁의 품으로 돌아가고 한 빛깔에 물든다. 이 거대한 힘은 우주가 만들어 놓은 촘촘한 그물이다.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우주의 섭리를 미물인 인간이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이 어둠의 시간을 막을 수도, 가둘 수도 없으니 얼마나 공평무사하게 순환하고 있는가. 밝음과 어둠의 시간, 삶과 죽음의 경계, 집과 무덤의 공간은 함께 바라보며 저무는 일들이며, 모두 저녁의 걸음 속에 놓여 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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