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 견디며 강인한 옛 선비처럼 내년 봄에도 여린 잎 피우길

60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쉬나무에 의지해서 지금도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 단군 이야기가 있다면 포항은 연오랑세오녀 이야기가 있다. 단군 이야기에 그 기본 사상이 ‘홍익인간’이라면 연오랑세오녀는 ‘일월사상’ 즉 해와 달의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았는데,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해조류를 따러 나갔다가 큰 바위가 나타나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왕이 됐다.

한편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바닷가에 찾으러 갔다가 그 역시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의 광채가 없어졌다. 그래서 왕이 사자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게 된다. 연오랑은 돌아가는 대신에 세오녀가 짜준 비단을 주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라고 말해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더니 해와 달이 전과 같이 됐다. 그리고 비단을 나라의 보물로 삼고 창고에 보관했는데 그 창고 이름이 ‘귀비고’라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살펴보면, 영일현이라는 지명에 해 일(日)자가 들어있다. 영일과 연일은 혼용해서 쓰였던 거로 본다. 즉, 영일, 연일, 그리고 연오, 혹은 영오 모두 해와 관련된 이름이다. 해와 달과 관련된 지명은 그 외에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는 ‘일월지’가 있다.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난 후 일월의 정기가 없어졌을 때, 연오랑이 보내준 비단으로 제사를 지낸 장소가 바로 일월지이다.

현재 일월지는 해병부대 안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120호로 지정돼 있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상정리에서 약전리 쪽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에 ‘흰날재’라는 마을이 있다. 그 지역에 있는 삼봉산 정상에서 북쪽 아래 계곡을 끼고 산지에 둘러 싸인 마을로 ‘광명리’라는 곳이 있다. 또한 오늘날 대송면에 속하는 ‘옥명리’도 있다. 그리고 ‘중명리’란 지명도 있고, 중명리에서 형산강 건너 쪽으로는 오늘날 자명리라 불리는 옛 이름으로 ‘등명리’가 있다. 즉, 희날재부터 광명, 옥명, 중명, 등명이 있는데 이는 해가 떠서 지는 방향으로 정확히 일치해 있으며 그해의 밝기에 따라붙은 이름이라 하니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해가 한가운데 위치했다고 지어진 중명은 다시 중명1리와 중명2리로 나뉘는데, 중명1리는 바로 부조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부조장은 175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형성됐던 장이다. 윗부조장, 아랫부조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윗부조장은 현재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이고, 아랫부조장은 포항시 연일읍 중명1리에 해당한다. 형산강으로 보면 포항이 경주보다 하구니까 아랫부조장이라 불렀다. 하지만 아랫부조장이 바다와 만나는 대포구여서 훨씬 더 번성했으므로 부조장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아랫부조장을 가리킨다. 부조장은 대구시장, 김천시장과 더불어 경북의 3대 시장이라 불렸다.

또한 서해의 강경장, 남해 마산장, 그리고 동해의 부조장이라 해서 남한의 3대 시장이라고도 했다. 오늘날에도 동해안 최대 어시장이 죽도시장인 것을 보면 당시에도 동해안의 대표시장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을 팔았을까? 부조장은 주위 환경이 무척 좋았다. 인근 안강지역은 곡창지대였고, 포항은 넓은 염전이 있었다. 그리고 영일만 바다는 풍부한 수산물이 넘쳐났다. 게다가 넓은 포구여서 큰 배의 출입 또한 가능했다. 경주읍내장과 영천읍내장 등 배후에도 큰 시장들이 있어서 함경도의 명태, 강원도 오징어, 포항 연안 청어와 소금을 내륙으로 팔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산물을 교역했다고 한다.

이렇게 큰 시장인데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섭섭하다. 바로 옥녀봉 전설인데, 옥녀봉은 형산의 봉우리 이름이다. 효심이 지극한 옥녀가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약을 구하러 간 곳이 바로 부조장터이다. 거기서 젊은 상인을 만나지만, 젊은 상인이 혼인비용 마련을 위해 장사를 떠난 후 소식이 없자, 옥녀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형산강 하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봉우리를 옥녀봉이라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 외에도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유적도 있다. 부조장과 관련한 선정비가 지금도 연일읍 중명1리 마을회관 앞에 있어서 당시 부조장이 큰 시장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현감 조동훈 복시 선정비’와 ‘현감 남순원 선정비’이다.

그리고 ‘좌상대 도접장 김이형 유공비’가 제산 아래쪽에 있다.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들인데, 부조장이 폐시, 즉 문을 닫았다가 지역민 요구로 다시 문을 열게 되면서 그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요즈음은 강변도로로 개발돼 있어서, 장터의 느낌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2008년부터 연일부조장터문화축제를 통해 그 명맥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포항 연일 원골숲

중명2리는 원골이라 불렀다. 고려말 공민왕 때 문정공 설곡 정사도 선생이 이곳에서 많은 유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며 서원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원골이라 불려졌다한다. 마을 뒤편에는 높이 1m가량의 ‘고려문정공설곡정선생유허비’가 남아 있다. 원골은 까마귀의 머리를 뜻하는 오두봉(烏頭峰)과 까마귀의 다리를 뜻하는 오족골(烏足谷) 사이에 자리했는데, 여기서 지명에 연오랑과 세오녀처럼 까마귀 ‘오(烏)’자가 들어간 것도 재미있다. 이 ‘오’자는 바로 삼족오할 때 그 ‘오’자이다. 삼족오가 무엇인가. 태양 속에 사는 세발 달린 까마귀이다. 바로 태양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포항 연일 원골숲

그러니 이곳 원골은 ‘연일읍’이든 ‘중명리’라는 지명에서나 산이름 ‘오두봉’과 골짜기이름 ‘오족골’ 모두에서 해의 상징이 들어가 있다. 이 곳에 원골숲이 있다. 유강대교 건너 영일만대로를 따라 중명리를 지나가면 우측으로 아름드리 나무숲을 볼수 있다. 이 숲은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생 회화나무 7본과 말채나무, 팽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숲이 주는 치유효과를 실감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귀한 것은 600여 년생 회화나무가 쉬나무에 의존해 지금도 봄이면 힘차게 여린 잎을 보여준다. 쉬나무와 회화나무는 옛날 선비가 이사를 갈 때 꼭 준비해서 가는 나무라고 한다. 쉬나무는 열매를 따서 등잔불을 밝히는 기름을 만들고, 회화나무는 ‘학자수’라 해 고고한 선비임을 알리는 목적이다.

하지만 숲의 보존상태와 관리상태를 보면 오히려 이렇게 나무들이 살아있어 주는 게 놀랍고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나무의 가운데 목질 부분은 다 비워진 채 껍질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회화나무의 동공은 쓰레기통 취급을 받을 뿐 아니라 밭 가운데 있어서 접근도 쉽지 않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늘이 좋은 노거수 사이에는 왜 그렇게 늘 정자를 짓는지 모르겠다. 특히 원골숲에는 육중한 콘크리트로 정자를 지어 주변 나무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운동기구 설치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컨테이너 박스까지 도무지 숲을 아끼는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워 안타깝다. 얼마 전 다시 찾은 원골숲에는 또 무슨 공사를 하는지 혹여 나무가 다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된다.

요즘 중명리는 중명자연생태공원이 있어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최근에는 입구에 포항국민여가캠핑장도 조성됐다. 이곳을 가려면 반드시 원골숲을 가로 질러 난 도로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 우리에게 더 위안을 주는지 가본 사람은 안다.

이재원 경북 생명의 숲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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