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토벌사 다룬 日 '진중일기'서 향토사가 황용건씨가 발견 공개
"의병대장 운강 이강연 선생 모습 생생하게 기록돼 사료 가치 커"

문경 진남문

2004년 문경시가 복원한 문경 석현성(石峴城) 진남문(鎭南門)을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인 1907년 9월 22일 일본군 공병 소위 혼지츄 오카모토(本日岡本. Honjitsu Okamoto)가 폭발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문경 향토사가 황용건(62)씨가 15일 공개한 이 자료는 1907년 7월부터 2년 간 한국에 주둔하며 일본에 항거하던 의병, 그중에서도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을 쫓는 기록이 생생한 ‘진중일지(陣中日誌)’다.

진중일지 표지

문경 진남관문은 그동안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소각설, 1896년 1월 15일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의병대장 퇴각 후 왜인 소각설 등으로 알려져 왔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소각설은 한글학회가 1978년 만든 ‘한국지명총람’ 5, 경북편Ⅱ에 “진남관문터(鎭南關門-)는 돌고개 남쪽, 곧 할미성(군 산천)의 남문루(南門樓)이며, 동학란 때 불탐”이란 기사에 근거하고 있다.

1896년 소각설은 1992년 문경문화원 ‘문경지역의 산성’, 1998년 향토사료 제13집 ‘고모산성(姑母山城)’에 “석현성은 1896년 1월 15일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이 이끄는 문경 의병이 퇴각한 뒤에 왜인들이 불을 놓아 태운 것”이라는 기사에 근거 한다.

이번에 황용건 씨가 발견한 ‘진중일기’에는 일본군 “국지(菊池) 대좌가 9월 13일 오전 6시 30분에 제2대대장 불파(不破)소좌에게 ‘전위(前衛)’를 맡아 진남관을 거쳐 문경으로 향하도록 했다.(중략) 일본군은 오후 4시에 진남관을 지나 문경에 도착했다. 진남관에서 문경에 이르는 전선은 모두 잘려 있었고, 전주도 넘어져 있었다. 또한 일본인 집과 일본인과 관련 있는 한인의 가옥은 모두 파괴되고 소각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보여 진남문의 존재와 폭발이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진남문은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있는 ‘문경읍지(聞慶邑誌)’에 “석현성은 계사년 (1893, 고종 30년) 문경부사 김정근이 진남문이란 문루를 6칸 규모로 신축한 것이며, 성벽의 길이가 385파(把)다.(石峴城 當 癸巳 府使金楨根新築 門曰鎭南門 門樓六間 東西長三百八十五把 設置守城別將)”라는 기사와 같이 1893년에 건축한 것이고, 건축 후 14년 만에 일본군에 의해 일본이 한국을 침탈과정에서 폭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진남문은 2004년 문경시가 복원했고, 현판 글씨는 고 심경 황규욱 선생이 썼으며, 향산 김승수 조각가가 새겼다.

황용건 향토사가는 “일본군이 한국에 와서 의병들을 토벌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된 이 자료는 특히 불멸의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며, “그 속에 진남문 폭발 기록, 문경의 당시 의병 상황과 김용사, 대승사의 일제 항쟁 등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진중일지
진중일지
황진호 기자
황진호 기자 hjh@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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