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영화 <러브레터>(이와이 슌지·1999)는 제목처럼 ‘사랑의 편지’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살아생전에 사랑했던 두 여인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랑의 진실과 가치를 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편지’입니다. 형식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습니다. 그 마음을 열고 주고받는 문자행위를 통해서 옛 애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며 두 여인은 잃어버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먼저 편지를 보내는 쪽은 ‘현재’의 애인입니다. 그녀의 편지(요청)를 받아서 ‘과거’는 응답합니다. ‘현재’는 그저 ‘과거’의 복사본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입니다. ‘현재’는 ‘과거’에게 “내가 환상이었던 거죠?”라고 묻고 과거는 현재에게 “그래, 진짜는 나였어!”라고 대답합니다. 두 사람은 주변(새로운 남친과 친한 직장 동료)의 냉소를 견디면서 그런 현문우답의 주고받기를 계속합니다(과거의 애인은 남자의 죽음을 모릅니다). 아픔은 있지만, 그 주고받는 문자행위를 통해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절실한 치유책을 찾아냅니다. 상실감이 앗아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찾아옵니다. 애절한 공동의 노력이 그런 승리를 가능케 합니다.

물론 영화 <러브레터>의 감동이 그런 ‘승리하는 인간(의 묘사)’에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영화의 진짜 재미는 사실 다른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과거의 연인이 현재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기억의 복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복원된 그녀의 기억 속에서 빛나는 청춘, 그 불패의 첫사랑을 봅니다. 그녀는 끝까지 그것을 부정하려고 합니다만(그래야 자신의 자아-버림받은-가 상처받지 않는다고 그녀의 무의식은 강요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흘리는 눈물로 결국 죽음보다도 더 깊고 애절한 자신의 첫사랑을 인정하고 맙니다. 그렇게 자신의 첫사랑을 다시 찾아오는 과정을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게 이 영화의 진짜 매력입니다. 관객들은 자신의 첫사랑을 영화 속의 첫사랑에 오버랩시키면서 진한 동병상련을 경험합니다. 영화에서 줄곧 지배적인 이미지로 사용되는 하얀 눈처럼 관객들의 첫사랑들도 순백의 이미지로 한 번 더 윤색(潤色)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첫사랑은 또 한 번 영원해집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좀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영화 <러브레터>는 ‘귀신이 보낸 편지’가 살아있는 병든 인간들을 구제한다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 속 남자주인공(소년시절)의 시크한 이미지가 그런 잡념을 부추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귀신(이츠키男)은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생전의 연인(히로코)에게 오타루에 있는 자신의 분신(동명이인)이자 첫사랑인 만성 감기증 환자, 이츠키(女)에게 편지를 쓰게 합니다. 귀신은 3주기 추도행사 때 자신의 집을 찾은 히로코에게 그 편지가 가야 할 곳의 주소를 가르쳐 줍니다.(앨범의 주소). 그녀는 자신의 팔뚝에 그것을 기록하지요. 마치 영혼의 문신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그렇게 귀신의 당부를 받아들입니다. 히로코가 “오겡끼데스까?(건강하십니까?)”라고 ‘러브레터’의 서두를 장식하는 것도 물론 귀신이 시킨 것입니다. 이츠키(女)가 늘 감기를 달고 산다는 것을 귀신은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말은 단순한 안부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귀신이 현세의 연인들에게 던지는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잘들 살아주세요!”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순백의 설원(雪原)에서 행해지는 히로코의 절규, “오겡끼데스까?”도 제대로 해석이 됩니다. 히로코의 설원에서의 외침은 중의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히로코가 죽은 남자 애인에게 던지는 원망 섞인 안부 인사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혼자 두고 떠난 남친이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이츠키(女)는 훨씬 더합니다. 아예 그 기억을 지워버리고 살아왔습니다. 두 번 째는 귀신의 당부입니다. 히로코를 통해 “나는 괜찮은데 당신들은 어때요?”라고 묻습니다. 잘 살아달라고,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죽어서도 살아있는 자들을 걱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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