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왕 부차에게 복수전을 대비하던 월왕 구천은 범려를 재상에 임명하려 했다. 범려는 재상 자리는 대부 문종이 적임자라며 사양했다. 군사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이 문종보다 낫지만 백성을 따르게 하고, 민심을 하나로 모아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는 자기보다 문종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재상으로 삼고자 했지만 범려와 같은 이유를 대면서 소하를 추천했다. 진나라 목공은 소금 상인의 노예인 백리해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상객으로 대접했다. 재상 공손지도 백리해가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간파했다.

“우리 진나라는 멀리 벽지에 떨어져 있고, 백성도 어리석고 무지하니 이는 패망에 이르는 위험의 근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재상이란 높은 자리에 있을 만한 인물이 못됨을 깨달았습니다. 저 스스로 재상 자리를 양보하고자 합니다.” 재상 공손지는 목공에게 재상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주청을 드렸다. 만인지상의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공손지의 인품을 높이 평가한 목공은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널리 빈객을 구하지 않고서도 성신(聖臣)을 얻으셨으니 이는 임금의 복록입니다. 또 신은 어진 이를 만나 자리를 양보할 수 있게 됐으니 이는 저의 복입니다. 지금 임금께서는 이미 복을 얻으셨는데 저만 복을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공손지는 재차 사직을 청했지만 목공은 여전히 윤허하지 않았다.

“저처럼 불초한 자가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바른 도리를 잃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를 높은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은 임금의 덕을 어그러뜨리고 제 자신에게도 역행하는 일이므로 도망칠 수 밖에 없습니다.” 공손지의 세 번째 사임 주청에 목공도 더 말릴 수 없어 사임을 윤허했다.

재상 자리를 고사한 이들은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었지만 명철보신(明哲保身)을 위해 벼슬을 탐하지 않았다. 입법부 수장을 지낸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총리직을 수락,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스스로 추락시켰다.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을 훼손, 국회를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시킨 처신에 대해 국민의 실망이 크다. 벼슬이 탐나 나라의 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역사에 남을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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