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우 사)국가디자인연구소 이사장
허성우 사)국가디자인연구소 이사장

북한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예고한 연말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북한은 미국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핵·미사일 도발을 감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미국도 육·해·공 핵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미국의 3대 핵무기 영상을 공개하는 등 대북 군사옵션 경고를 강하게 보내고 있다. 만일 북한이 비핵화 협상 종료를 선언하고 실질적인 행동에 돌입한다면 한반도 군사대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남·북·미 간 어렵게 조성된 데탕트의 막을 내리고 한반도 정세가 다시 2년 전의 위험천만한 치킨게임으로 퇴행하는 건 아닌지 대단히 우려스럽다. 북한이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면 우리도 그에 맞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 첫걸음은 북한의 비핵화가 사실은 허황된 환상(幻想)이자 신기루(蜃氣樓)였음을 확인함에 있다.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는 진짜 이유는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다. 북한은 핵 보유를 체제생존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핵 보유를 바탕으로 당시 적국이던 미국과 수교하고 경제발전을 이룬 중국의 ‘양탄일성(원자탄·수소탄(양탄·兩彈), 인공위성(일성·一星))’이 북한이 추구하는 핵·미사일 개발 모델이다. 여기에 핵 포기 이후 미국에게 경제 보상을 받았지만 결국 미국 주축인 NATO후원군에 의해 사망한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의 말로(末路)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에서 핵 집착을 강화하게 하는 반면교사의 사례로 삼을 만할 것이다. 북한은 은폐와 기만을 통한 핵 개발, 소극적 협상을 통한 경제적 보상, 합의 파기와 군사적 위협 과정을 되풀이하며 핵 능력을 완성해왔다. 그러는 동안 우리 정부는 지속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관련 ‘우리가 비핵화의 모범을 보이면 북한도 핵을 포기할 것’을 기대하며 순진하고 안일하게 대응해 왔다.

문제는 또 있다. 한국 스스로가 ‘한미동맹’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이다. 66년 동안 이어져 온 한미동맹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과도한 안보맹신으로 우리 스스로의 국가 안보를 소홀히 해왔다. 미국은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해 한국에게 ‘확장억제’를 약속했지만 미국이 과연 자국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동맹국을 보호할 것인지 냉정하게 판단할 때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 국민의 안전”이라는 발언은 결코 허투루 한 소리가 아니다. 게다가 북한을 암묵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미국 내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대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생산시설 등만 폐기하는 이른바 ‘소규모 딜’을 체결한다면 결국 한국만이 북한의 핵 인질은 물론 동맹국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한미동맹과 더불어 ‘자주국방’의 길을 모색해 왔어야 했다.

동맹국인 미국도 예측불가능한데 중국에게는 대북문제를 의존할 수 있을까? 지난 23일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과 중국은 친구이자 파트너’임을 강조하고 ‘북한과 미국이 대화 모멘텀을 살려 나가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며 북미협상 재개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은 전통적으로 순망치한(脣亡齒寒)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한의 6차 핵실험 후 미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원유공급을 중단하는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을 추진했지만 중국의 반대로 포함되지 못했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함께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바 있다. 반면 중국은 북핵 대비 최고한의 안보조치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한 우리나라에게 강도 높은 경제보복으로 내정간섭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취했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북한의 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해법은 이제 자명해졌다. 대북억제력과 한반도 전력균형을 위해 ‘핵무장’이 불가피하다. 핵에는 핵으로 맞대응할 수밖에 없다. 한 국가의 재래식 전력을 모두 쏟아 부어도 수소탄 한 발을 당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통미봉남(通美封南)이든 선미후남(先美後南)이든 한국이 독자적으로 북한에 대적할 능력이 없으니 북한이 한국을 무시하고 미국만을 상대하려고 하는 것 아니겠나? 결국 한반도 평화에 대한 꼰대 같은 생각은 버려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것, 그래서 2020년은 ‘남북 핵 균형의 시대’에 대해 정치권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전개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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