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2016년 6월 23일의 국민투표에 참가한 영국 유권자의 52%가 유럽연합(EU)을 탈퇴하기로, 즉 ‘브렉시트(Brexit)’를 시행하기로 결정한 지 3년 반 만인 이번 달 말일에 영국은 유럽의 품을 공식적으로 떠난다. 탈퇴파와 잔류파로 나뉜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들이 철천지원수로 갈라지는 극심한 국론 분열을 겪은 영국이 그동안 EU를 떠나지 못한 데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영국의 정치인들이 져야 한다고 영국 국민과 언론은 한목소리로 주장한다. 테레사 메이(Theresa May) 당시 영국 총리가 2018년 11월에 EU와 타결한 합의안에 대해 집권 보수당의 EU 탈퇴파 의원들은 ‘영국이 비(非)EU 국가들과의 무역 협정을 체결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 합의안을 의회에서 세 번이나 부결시키는 데에 일조하였다. 이로 인해 EU 탈퇴 일자가 두 차례나 미루어지면서 메이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지난 7월에 후임 총리로 선출된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은 EU와의 합의가 없는 ‘노딜 브렉시트’를 감수하더라고 무조건 2019년 10월 31일에 나간다는 강경 입장을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보수당의 EU 잔류파 의원들이 ‘국가 경제를 파탄시킬 “노딜 브렉시트”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하며 야당인 노동당과 연합하여 ‘노딜 브렉시트’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존슨은 탈퇴 일자를 2020년 1월 31일로 또 한 번 미룰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자신이 이끄는 당 소속 의원들을 설득시킬 수 없는 총리나, 자신이 소속한 당의 수뇌부의 지시를 거부하는 의원들이나 매한가지로 국민이 기대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여 국가를 혼란과 갈등의 도가니로 빠뜨렸다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50년 가까이 소속되어있던 EU를 떠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영국의 정치인들은 진정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논의하였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가 위협을 받을지언정 스스로의 판단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였다. 실제로 ‘노딜 브렉시트’ 방지법 통과에 협조하여 존슨으로부터 당적을 삭탈 당한 21명의 보수당 출신 의원들 중 전직 재무부장관,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등이 포함되었으며, 대부분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하거나 아예 출마하기를 포기하였다. 정치적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원칙을 지키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정치를 하겠다는 결의를 보인 영국 정치인들의 자세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자신이 독립된 판단과 의사에 따라 공공선(公共善)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는 대의제(代議制)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브렉시트가 민주주의에 타격을 입힌 듯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위로부터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갈대와 같은 대중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국민의 대표’의 표상을 제시함으로써 민주주의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는 중요한 귀감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작년에 한 고위직 인사의 장관 임명으로 인해 브렉시트 못지않은 국론 분열을 경험하였고, 그 파장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인사의 흠결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공공선을 결정하기 위해 선출된 대표들은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지 않았고 부적격을 부적격이라 말하지 않았다. 진영 논리에 철저하게 사로잡힌 위정자들은 변명할 수 없는 것을 변명하기 위하여 온갖 궤변과 엄포를 거침없이 쏟아내었으며, 제기해야 할 문제를 용기 있게 제기한 동료들은 배신자로 매도되어 인터넷과 전화 등으로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지키고자 한 의원들 때문에 영국인들에게 있어 지난 3년 반은 불확실성과 답답함의 연속이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의도의 무원칙과 무개념을 바라보며 브렉시트 시대의 영국인들이 차라리 부럽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과연 필자 한 사람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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