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 교수

지난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곳곳에서 이를 기리는 행사들이 열렸다. 그 현재적 의미와 미래적 계승을 위한 온갖 말과 글들이 쏟아졌다. 그 가슴 뜨거웠던 한 해를 보내고 우리는 2020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필자는 지난 한 해를 누구보다도 바쁘게 보냈던 터라, 경북일보 칼럼을 부탁받고 승낙을 하고서도, 다시 번복할 수 없을까 수많은 핑곗거리를 찾았다. 그러나 또 마음 한편에서는 올해가 청산리전투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지라 항일투쟁의 치열성에 견주어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경북인의 만주지역 항일투쟁사를 알리고 그 현장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다.

필자가 안동인의 만주지역 항일투쟁의 현장을 찾아 첫 답사를 시작한 것은 2005년 2월이었다.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 추진한 ‘석주유고’국역사업이 그 발단이 되었다. 국역사업에 참여한 연구원들이 지명(地名) 조사도 할 겸,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 현장을 답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당시 보조연구원이었던 필자는 답사 일정을 짜고 준비하는 일들을 맡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 10명은 만주망명 인사들이 망명길에 나섰던 2월에 맞추어 만주 탐방 길에 올랐다. 난생처음 대하는 만주의 겨울은 생각 밖으로 모질었고, 100여 년 전의 현장을 더듬는 여정조차 간단치 않았다. 8박 9일의 일정을 마치던 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필자는 그 길에서 ‘한 인간의 선한 의지’를 곱씹게 되었고 나라가 무너지는 극단적인 현실 앞에 ‘옳은 길’·‘사람다운 길’·‘더 적절한 길’을 고민하며, 광복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들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이어가고 가르쳐야 할 중요한 교육적 자산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근무하면서 교사들과 지역민을 모시고 수차례 탐방 길에 나섰다. 두어 차례 심화답사와 조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사이 벌써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경북인의 만주항일 투쟁사에 대한 연구 성과도 제법 쌓였다. 그러나 15년이라는 기간의 성과치고는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1934년 경상북도경찰부에서 펴낸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에는 “1911년 중에 이주자는 2500여 명에 달하고, 그 후 해마다 증가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이주 후의 생활은 예기한 바와 달라서 귀환하는 자도 역시 증가하게 되어, 현재 그곳의 거주자는 2만5000명 내외일 것으로 판단된다”고 기록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단순 이민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떠나는 발걸음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또한 만주에서도 끝없이 반복되는 이들의 이주와 정착의 역사가 만주 지도위에 어느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만주에서 버티어 낼 수 있었던 경북인의 ‘무장항일투쟁의 이론’은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역사가 한국근현대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또한 함께 떠난 여성들이 누구였는지, 여성들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등 여전히 촘촘하게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더불어 돌아온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제들을 필자가 칼럼에서 다 풀어낼 수는 없다. 그저 2020년 한 해 동안 그들의 역사를 가능한 범위 안에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