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 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 관장

우리가 익히 아는 국민화가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가 있다. 사람에 따라 갑론을박이 필요하지만 여기에 이쾌대, 이인성이라는 대구지역 출신의 근대미술가도 포함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화가들은 주로 서양미술사의 인상파, 야수파, 표현주의, 추상주의를 따른 화가이다. 캔버스 전경에 물감과 붓 터치로 아름다움을 표현한 형상예술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과 동년배인 곽인식의 경우, 초기에는 이들처럼 화면에 아름다움을 찾고자 인물표현과 초현실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처한 환경과 기질이 남달랐을 것이다. 빈곤 속에서도 귀족풍의 철학적 사유를 잃지 않고 탐구하였다. 옛말에 “양반 가문의 선비는 가난하여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성리학의 말씀처럼 그는 이론과 실기에서 모두를 실천하였다. 이국의 일본땅에서 재일거류민의 설움과 민족분단의 비애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과 소신을 지켰다. 그러한 환경에도 동시대미술의 영역으로 나아갔다. 아마 유럽의 현대미술운동과 뉴욕 화단의 새로운 변화에 자극을 받았다. 이어서 일본 모노하화파에 이론적 영향을 준 교토학파의 철학가 니시다 기타로의 ‘무(無)의 세계’에도 의식을 하였을 것이다. 60년 대 초부터 여러 가지 물질을 이용하여 자기의 예술철학을 이어 나갔다. 가령 유리를 깬다거나, 구리판에 흔적을 가하거나 접합하여 균열과 봉합을 시도한 작업을 선보였다. 이것은 남북한 통일에 관한 작가의 의지로 보인다. 시대의 상처를 극복하는 곽인식의 사회적 역할의 시대정신으로 생각된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일본특별지부 이사장도 역임하면서 후배예술가를 이끌었다. 민단과 조총련의 합동 연립미술전(1961) 연극 황토(1962), 통일음악회(1962)를 주도한 활동가로서의 면모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역할로 한 때 그는 고향 한국으로의 입국을 거부당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다.

곽인식의 초상사진(1975)

70년대부터 작고한 88년 까지는 돌과 나무 종이를 이용한 자연물에서 생성된 물질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하게 된다. 물성(thinghood)과의 속삭임으로 인간과 물질이 하나가 되는 정신의 합일을 작품으로 나오게 되었다. 덧붙여 어릴 적부터 체득한 서예의 행서와 초서체로 동양미술의 본질인 인간이 자연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해준다. 이번 100주년 전시를 통하여 밝혀진 것 이지만 곽인식의 모친 정악이는 조선말기 영남의 대가 석초 정안복(1833~?)이라는 걸출한 선비화가의 장손녀이다. 유년시절 어머니로부터 영남 3석 중 한분인 정안복의 문인화 작품과 글씨를 자연스럽게 듣고 보고 하였을 것 이다. 선조의 이러한 DNA는 서양미술과 다른 문방사우의 지·필·묵·연이 갖는 동양미술의 바탕이 된 곽인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종이에 채색된 부유하는 아름다운 점들의 모습은 ‘형상에서 물성으로의 초극’을 보여주는 수적(手迹)들이라 하겠다. 즉 화면의 전경과 후경, 표면과 후면이 하나가 되는 물질과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리라. 현풍에서 태어나 서울과 도쿄, 다시 대구로 이어지는 초기활동 시절과 청년기 중년, 말년의 도쿄에서의 활동으로 작업을 마쳤다.

탄생 100주년 귀향전람회가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어느 관람자는 매우 휴일마다 10번 정도 가서 보고 심금을 울렸다고 했다. 이제 시작이다. 달성군 낙동강가에 곽인식 미술관을 건립하여 위대한 작업을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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