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 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 관장

지난여름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는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라는 대규모 전시가 성황리에 열렸다. 1809년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연경인 베이징을 방문한 이래 210년 만에 베이징을 다시 찾은 김정희의 특별전이었다. 30만 관람객이 놀라움을 가졌다. 그 관람객 중 북한 만수대 창작사 길정태관장 왈 추사 선생의 개성은 ‘변화’ 한마디로 압축했다. 실제 추사의 서법은 일생동안 변화와 혁신의 모습이었다.

김정희는 충남 예산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신동의 기질로 많은 일화를 담고 있다. 추사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봉직할 때 추사는 대구와 경북을 왕래하였다. 합천 해인사 상량문을 청년 시절인 33세 때 짓고 적었다. 집안이 불교에 적극적이었다. 당쟁의 모함으로 아버지 김노경의 귀양을 시작으로 50대 추사는 약 9년 간을 유배지 제주도에서 보냈다. 1848년 유배가 끝난 뒤 한양의 한강변, 지금의 용산 지역에 터를 잡았다. 강가의 풍광을 시로 읊기도 한 시절이었다.

이 시기 영천 은해사의 혼허 주지 스님은 새로운 현판과 갈판을 추사에게 부탁했다. 팔공산의 큰 사찰 은해사가 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이었다. 새로 대웅전(大雄殿), 은해사(銀海寺), 불광(佛光), 일로향각(一爐香閣) 등을 정성껏 써주었다. 그 후 추사가 완성된 현판과 갈판을 보기 위해 은해사에 와서 보니 불광, 불(佛)자의 내림 획이 잘려져 갈판으로 걸려져 있질 않는가? 즉시 주지 스님에게 도끼를 가져오라 하여 그 갈판을 부셔 버리고 돌아갔다. 그 후 주지 스님은 사과하고 원래 모습대로 ‘불광’을 만들어 명작 갈판이 탄생되었다.

추사 김정희 - 은해사 불광 탁본

그 전부터 은해사를 가보면 범상치 않은 사찰의 기운과 소나무들, 그리고 추사의 흔적으로 감동을 가졌다. 평소 추사의 생활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이 아니라 영천 은해사라는 역사성과 추사 명작이 잘 어우러진 이곳이라고 여겼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추사의 현판과 갈판의 탁본작품을 구하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 우연하게 <불광>갈판의 탁본을 보았다. 몸에 전율이 왔다. “과연 추사로구나.” 불(佛)자와 광(光)자의 공간구성인 장법과 필획이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대웅전 현판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에 송곳이 박히고 소름이 돋았다. 마치 쇠꼬챙이가 바위를 뚫는 기세의 필획이었다. 그런 탁본의 수장에 대한 갈망이 인연이 되어 산해숭심(山海崇深·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일로향각(一爐香閣·일상예불을 준비하는 곳)을 포함한 명품 탁본을 수장하게 되었다.

요즘 마음이 심란하거나 번거로울 때 이 명작들을 꺼내어 본다. 차를 한잔 하며 작품 속의 추사선생과 대화를 나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의 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현대사회는 문화와 예술이 국가와 국가, 도시와 도시간의 경쟁 시대이다. 청나라 문인들이 감탄하고 일본의 지식인들이 일찍부터 연구한 동아시아의 석학 추사 김정희의 보물창고는 당연히 은해사이다. 지역을 넘어 한국의 대표 야외 서예박물관으로 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추사와 현대수묵의 콘텐츠를 계발하여 영천 은해사가 세계적 관광 명소로 거듭 나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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