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997년 5월, 43세의 영국 노동당 당수인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영국 총선에서 압승함으로써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의 집권을 시작으로 18년 동안 지속되었던 보수당의 오랜 통치 기간은 막을 내렸다.

카리스마와 젊음, 에너지를 두루 갖추었던 블레어는 영국의 새로운 시작과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였고 영국인들은 그의 활력과 매력에 열광하였다. 반면에 선거에서 참패한 보수당은 전진해야 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유로화(euro) 도입 반대, 파운드(pound)화 유지 찬성’이라는 국민의 실생활과 동떨어진 구호만 목놓아 외치다가 2001년 총선에서 또다시 블레어에게 참패당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습에 동참하면서 노동당 정부의 철옹성 같은 인기가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보수당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던 영국 유권자들은 200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게 다시 승리를 안겨주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당시에 영국의 정치평론가들 중 일부가 ‘보수당은 이제 끝났다’라고 혹평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닌 듯 보였다.

이러한 노동당 정부의 독주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보수당이 다시 집권의 자격을 갖추기 시작한 시점은 2007년 보수당 전당대회였다. 2005년의 선거 참패 후 보수당 당수로 선출된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과 당 수뇌부는 이 전당대회에서 1백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한화 약 21억원) 이하의 자산에 대한 상속세를 전면 폐지함으로써 상속세를 내는 영국 가구의 비율을 37%에서 2%로 끌어내리겠다는 간단하면서도 파격적인 공약 발표를 하였다. 국민이 공감할 수 없는 추상적인 슬로건에 의존하고 정부의 정책에 무조건 반대만 하기보다 집권당과는 구별되는 신선한 대안을 능동적으로 국민 앞에 제시한 것이었다. 이로써 보수당은 개인 자유의 극대화 및 정부 역할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정당, 국가의 허리인 중산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차별된 정체성을 주장하며 유권자의 지지를 당당하게 호소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 중산층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을 수 있었던 보수당은 단숨에 8%의 지지율 상승을 기록, 노동당의 견고한 지지벽을 깨뜨리는 데에 성공하며 줄곧 선두를 놓치지 않아 2010년 총선에서 재집권할 수 있었다.

4월 총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야권은 지금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총선 민심의 반이 ‘야당 심판론’을 지지한다고 나왔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유권자의 신뢰를 되찾고자 한다면 파격적이면서도 피부에 와 닿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들이 집권하면 무엇이 바뀔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저쪽이 아니다’라는 이유만으로 표를 달라고 한다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젊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야권의 모습은 어떠한가? 상황이 어려워지기만 하면 길거리로 나와 장외집회를 주도하여 자신들의 존재 기반인 대의제(代議制)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국회의장 단상을 점거하여 괴성을 지르며 무질서의 극치를 보여줌으로써 SNS를 통해 선진 정치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은 젊은이들의 혐오와 빈축을 사고 있다. 두루뭉술한 원칙을 내세운 보수통합만 외치며 밥그릇 챙기기를 위한 지분 다툼이나 벌이고 있다. 야권이 진정 집권하고자 한다면 국민의 지지를 ‘스마트’하게 얻을 생각을 해야 한다.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유권자의 표를 달라고 읍소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가두행진과 단상점거, 구조조정만이 야권이 이 난세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번 기회에 지구력 좋고 체격 좋고 목소리가 웅장한 후보들 순으로 공천하라. 그것이 차라리 더 효과적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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