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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망국(亡國)! 만주망명을 선택한 경북 선비들
[아침광장] 망국(亡國)! 만주망명을 선택한 경북 선비들
  •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20년 01월 16일 17시 0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1월 17일 금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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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1년 2월, 압록강 칼바람 앞에 선 사람들이 있었다. “칼끝보다도 날카로운 삭풍에 살갗이 아팠지만, 그보다 애간장이 녹는 듯했다.” 나라 잃은 비통함 때문이었다. 망국(亡國)의 선비, 그들은 고국을 뒤로하고 압록강을 건너기까지 수없이 되뇌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디에다 몸을 두어야 할지!

일제강점 직후 지식인들 사이에 최고의 화두는 출처(出處) 즉 처신이었다. 그 선택지 가운데 ‘죽음(自靖殉國)’과 ‘망명’은 큰 줄기를 이루었다. 전자가 철저한 의리론에 입각한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길이었다면, 후자는 조국광복을 향한 새로운 희망의 길이었다. 그 어느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전자를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고, 후자는 살아 고통을 감내하며 국권 회복을 도모해야 하는 길이었다.

안동의 석주 이상룡은 자신이 걸어온 52년의 길을 돌아보며 “의병과 대한협회 안동지회가 실패하고 나라가 망한 지금, 결행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죽음”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어떤 경우라도 ‘바른길을 택하는 것’이 유가(儒家)의 근본임을 알고 있지만, 그 ‘바른길’이 곧 ‘죽음’이라는 확신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백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을 뜻을 품고,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펴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죽음 대신 망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경북은 일제강점 직후 자정순국자가 가장 많았던 곳이지만, 만주 망명자도 적지 않았다. 그 방법과 정치적 이념은 달랐지만, 나라와 강토가 오롯이 우리 손으로 보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경북인의 만주망명과 관련하여, 일제 측 기록인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부·1934)는 만주망명을 이끌어 낸 주역으로 안동의 이상룡과 김대락을 손꼽았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경북 일원의 수많은 지사들이 만주 망명을 선택하여, 1911년 한 해만 2천500 명이 만주로 망명했다고 파악하였다.

경북 유림들이 망명지를 만주로 선택한 배경에는 그곳이 우리의 옛 영토라는 민족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신민회가 추진한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은 그 발걸음을 재촉하는 촉매가 되었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경북 유림들은 망명길에 온 가족을 대동했다는 점이다.

이는 적(敵)의 땅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김대락은 심지어 2월의 추위를 무릅쓰고 만삭의 임부(姙婦)인 손녀와 손부까지 대동하였다. 적의 지배로 오도(吾道)가 무너진 땅에 어떤 가족도 남겨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들은 유가적(儒家的) 가족공동체가 만주에서도 고스란히 유지되길 희망하였다. 만주 망명 1세대는 대부분 유학을 닦으며 성장한 유림이었다. 유학의 출발은 스스로 완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지만, 그 인격체가 구현될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공동체는 중요한 틀이자 출발점이었다. 이러한 공동체가 망명지인 만주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길 희망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러한 남성들의 생각에 여성들도 뜻을 함께 했다. 망명길을 이끌어 낸 것은 남성이었지만, 여성들이 삼종지도(三從之道) 즉 전통시대의 부덕(婦德)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망명길이 분명한 대의(大義)임을 인식하였고, 그 뜻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이 정체성의 문제였다면, 망명지에서의 삶은 생존의 현장이었다. 만주 망명 결정과 이주 과정은 그 고단한 여정의 서막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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