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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I Love 미술] 완당 바람이 불다
[김진혁의 I Love 미술] 완당 바람이 불다
  •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 승인 2020년 01월 22일 16시 0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1월 23일 목요일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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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추사는 인복이 많은 사대부 학자였다. 초정 박제가(1750~1805)라는 북학파 석학과의 만남이었다. 1809년 자제군관 자격으로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가서 완원과 옹방강 이라는 청나라 문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다녀온 후부터는 필체가 옹방강과 흡사한 구양순 서체로 변하였다.

이어 완원의 ‘완’자를 따서 완당이라 하고 중국이라는 경학의 국제적 보편성에 편승한 학예일치의 경지를 찾았다. 이후 선배인 자하 신위(1769~1847)가 연경에 갈 때도 소개장을 써주며 길잡이 역할을 했다. 대체로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書如其人) 이라는 말이 있다. 추사의 글씨 변화를 보면 그의 삶 속 과정을 볼 수 있다. 어릴 때는 부족함이 없던 시절이다. 아름답고 균형미 넘치는 동기창 서체를 썼다. 연경을 다녀온 후부터는 구양순의 화도사비나 구성궁예천명의 글씨에 경도 되었다.

중년부터는 예서와 해서가 융합된 추사체의 골격이 시작된다. 이때까지는 글씨에서 풍기는 삶의 애절함이 보이지 않고 자신만만한 사대부의 긍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와 더불어 선비들이 즐기는 문인화의 사군자 중 유독 난초를 치는 것과 서법을 일치시켜 자신만의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을 이루었다.

이어 계속 승승장구 하는 추사에게 신의 질투가 있었는지 당쟁으로 죽음에까지 가게 된다. 조인영(1782~1850)과 권돈인(1783~1859)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유배길에 오른다. 그 유배길 에도 호남의 대가 창암 이삼만(1770~1847)도 만났다.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스님과 해후하면서 자신의 서예경지를 나타내었다. 주변 환경은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바닷가 제주 대정읍 초가에서 정제된 마음으로 수신을 하였다. 수많은 제자 중 스승을 따르는 문도에게 감격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 - 세한도(국보180호)

소치 허련(1809~1892)은 세 번이나 추사를 찾아 제주에 건너와 수발하였다. 우선 이상적(1803~1865)은 추사의 명작 <세한도>의 발문에 있듯이 연경에서 구해온 귀중한 책을 드렸다. <만학집>, <대운산방문고>, <황조경세문편>이 자그마치 수백 권이었다.

이 같은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세한도가 탄생된다. 추사는 이처럼 따르는 후학과의 인연이 많았다. 그러한 영향은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글씨와 난초에서도 보이기 시작한다. 난초의 명인 이하응과 추사는 먼 인척간이라 서로 존경하였고 이하응에게 서신으로 화법을 지도하였다. 추사는 청년 시절부터 말년까지 수십 년 지기로는 이재 권돈인이 있으며 글씨 또한 추사에 핍진 하였다. 요즘도 시중에 나오는 이재의 글씨를 추사글씨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렇게 당대에 추사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추사의 세 살 아래인 중인 출신 우봉 조희룡(1789~1866)은 추사를 따랐지만 서권기 문자향이 없다고 하대를 받았다. 그렇지만 완당바람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우봉이었다. 훗날 <호산외사>를 펴내며 추사를 흠모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차산 배전(1843~1899), 소우 강벽원(1859~1941), 석재 서병오(1862~1936), 성파 하동주(1869~1944), 이한복(1897~1940) 등이 추사체를 연구하여 완당바람의 속에서 자신의 필체를 과시하였다. 오늘날에도 제멋대로 쓴 글씨를 보고는 ‘추사체’같다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어린아이의 서투른 그림을 보고 마치 피카소 그림 같다고 하는 것처럼…최근 중국, 일본에서도 ‘완당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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