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에 많이 나서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도자그룹 인선에 후견인 노릇을 해서는 안되오. 당신은 원한을 쌓은 것이 대단히 많으니 많은 사람들과 협력하도록 하시오. 부탁하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오” 모택동이 인사에 간여하려는 강청의 요구를 거절, 그녀에게 보낸 회신이다.

1975년 초 인민대표회의 소집 이전에 국가기구의 인사를 단행해야만 했다.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 등 4인방은 문혁 공신으로 만족하지 않고 당·정·군의 대권을 장악, 모택동 사후 천하를 쥐기 위해 인사에 적극 관여하려 했다. 모택동의 충고도 강청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강청은 주은래, 섭검영, 등소평 등 국정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원로와 국가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데 사생결단이었다. 강청 일당은 곳곳에서 원로간부들을 끌어내 투쟁하고 파벌을 만들어 싸우면서 정국을 흔들었다. “경험주의는 수정주의를 도와주는 적”이라고 규정했다. 이 여파로 생산이 감소하고 업무가 마비돼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졌다.

모택동은 강청에게 자중하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강청은 마이동풍이었다. 모택동은 이미 83세의 고령에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고, 건강상태도 약화 됐지만 강청에겐 모택동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었다. 주은래 사후 등소평을 제거한 4인방은 인민대회당에서 자축연을 가졌다.

중국 역사에서 측천무후 서태후에 이어 강청은 대륙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으로 주목됐다. 하지만 강청의 전성기는 여기까지였다. 모택동이 죽자 정치국위원들이 재빠르게 강청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모택동 생전에는 강청이 정치국회의에 들어오면 모두 일어섰는데 강청이 회의에 들어와도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976년 10월 16일, 전국 언론은 모택동 죽음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을 공표했다. 바로 강청을 비롯한 4인방 체포 보도였다. 강청은 사형 선고를 받고 무기로 감형됐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문재인 정권의 비리수사를 막기 위한 ‘검찰인사 학살’에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른 추미애 법무장관이 강청의 인사 칼바람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판 강청’의 정치 말로가 벌써부터 주목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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