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인품의 삶과 행적으로 경북 미술사 근대화단 뿌리 배출

경주예술학교 미술과 창립기념전 1947년

경북미술사는 한국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많은 거목들을 배출해 내었고, 인문학적인 자료가 풍부한 역사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일괄적인 정리 및 기록을 체계화하지 않아서 한국근대미술사에서는 빈곤한 경북미술사로 비춰지고 있다. 그동안 대구지역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경북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들에 의해 기록되다 보니 전국미술사학자들에게는 대구 출신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4년 묻혀진 김준식(冠城 1919~1992)이란 작가가 발굴된 후 경북근대미술사에 대한 뿌리와 확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됐다.

김준식

경주 출신 김준식은 사후 22년간 묻혀 있었던 작가이다. 그의 업적과 작품들은 2014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기획된 ‘영남의 구상미술전’에 발굴돼 그에 관한 자료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가장 큰 성과는 경북 현대미술의 시원이 되는 ‘경주예술학교’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증거 자료들이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의 대학교 버금가는 예술학교임을 증명해줌으로써 한국근대미술사를 새로이 정립해야 할 정도로 중요성이 야기되고 있다.

김준식 작업실

김준식은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출발이 그렇듯이 경주 화단의 태동기부터 참여한 몇몇 일본 유학생 출신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대지주의 후손으로 태어나 동경의 태평양미술학교 재학시절 외에는 경주를 떠난 적이 없었던 토박이 화가이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신라의 고고 미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했고 1946년 4월 ‘경주예술학교(초대 교장 손일봉)’ 문을 열어, 미술과·음악과·국악과의 3개 학과를 주도적으로 운영했다. 이 학교는 남한 최초의 4년제 대학으로 계획됐던 만큼 교수진이 화려했다. 이후 1952년 2회 졸업생을 배출한 뒤 학교는 폐쇄됐고, 김준식이 기울어져 가는 가세와 건강 악화로 세인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경주예술학교’도 오랫동안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경주예술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생들은 한국근대화단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해왔고, 이들의 활동은 경북미술사의 바탕이자 뿌리가 됐다.

경주 예술학교 제1회 졸업생 사진 손일봉(교수) 김인수, 조희수 작가 등

김준식 작가에 대한 조사는 필자가 대백갤러리(구 포항대백쇼핑) 근무 시절부터 시작됐다. 우연히 대구백화점 소장품에서 김준식의 소품을 1점 보았는데 인상이 깊었고, 그가 경주 출생이라는 점을 알았다. 이후 2013년 어렵게 유족인 김병수(김준식의 장남)의 연락처를 알게 됐고, 그가 포항 어디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토대로 연락이 돼 그를 만나게 됐다. 유족인 김병수는 다행히 김준식에 대한 중요한 미술사적 사료가 되는 많은 자료와 몇 점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었다.

작가가 남긴 작품도 유구하지만, 작가에 대한 삶과 행적들은 오늘날 마음의 양식 제공은 물론, 차세대들에게 미술에 대한 친근감을 전승해 준다. 살아생전 김준식이 일본 유학 시절 태평양미술학교의 친한 벗, 즉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유명한 많은 화가들과의 일상생활, 인간관계, 그리고 예술관들에 대한 소소한 이야깃거리에 관한 자료를 누군가 의해 일찍 기록되고 알려졌더라면, 김준식에 대한 위상이 현재보다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을 가져본다.

김준식과 유명한 화가와의 인문학적 스토리가 처음으로 기록된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포항 출신 화가 장두건(1918년~2015년)의 자서전에 김준식과의 친분 내용을 알게 해 주는 기록이다. 김준식은 장두건과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유학 시절의 화우였다. 그것도 평범한 벗이 아닌 장두건이 고난이 있을 때마다 김준식에게 도움을 받았던 화우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일면은 오랫동안 묻혀 있던 김준식에게는 개인의 화업을 두텁게 해 주는 인문학적 스토리로서, 김준식에 대한 인물을 다양한 면으로 알리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장두건은 화가로서 성공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였던 같다. 사립학교인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니면서도 일본 최고의 관립미술학교 입학을 위해 틈틈이 준비했다고 그의 자서전에 쓰여 있다. 그러나 낙방으로 큰 상처를 입은 장두건은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는데, 화우인 김준식이 찾아와 위로와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 다시 화가의 길을 가게 만들어 주었다는 내용이다. 장두건에게는 여러 화우들도 있었겠지만, 김준식만이 직접 찾아와 위로와 용기를 주어 마음을 다잡았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김준식의 넉넉한 성품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크게 작용됐을 거라 짐작되고 친한 벗임을 알 수가 있다.

장두건이 또 다른 잊지 못할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3일 만에 서울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돼, 장두건은 피난을 가게 됐다. 인민군들이 젊은 남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가고 죽인다는 말들이 떠돌아 다니고 있어 장두건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걸어서 경주까지 피난하게 됐다. 이때에도 김준식은 벗인 장두건을 위해서 심신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는 내용이다.

김준식은 생전, 전국 문화예술인들이 경주를 찾는 이들이 있으면 물신양면으로 베푸는 삶을 살아왔다고 경주의 옛사람들은 기억한다. 찾아온 객들을 위하여 행랑채에 머물게 하고 언제 떠나도 상관없이 숙식 제공에 정성을 다했다는 이야기들은 김준식의 인품과 인간성을 알게 해 준다.

구룡포 풍경 (포항시립미술관 소장)

김준식도 황술조처럼 우리 지역 구룡포 풍경 1점을 남겼다. 유족인 김병수(아들)에 따르면, 인척이 구룡포에서 제일 가는 갑부(손복조)가 살고 있었으며, 해마다 여름이면 배 한 척을 김준식 가족을 위해 한 달간 사용하도록 해 주었다는 말을 하였다. ‘구룡포 풍경’도 아마도 가족과 함께 여름 피서철에 제작한 작품이라 추측된다. 시원하고 탁 트인 시야의 풍경을 김준식이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구도를 잡았다. 순박한 색채와 붓 터치로 구룡포의 풍경을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지만, 색채와 구도는 다소 어둡고 경직된 느낌이 감돈다.

향원정 1944년(개인소장)

‘구룡포 풍경’은 1979년에 제작됐다. 김준식이 72세로 작고하기 전, 20년간 오랫동안 병환으로 거동도 못 했다면 1979년은 그의 화업에 있어 중기에 해당 된다. 김준식이 젊고 의욕적인 화가 시절, 그의 초기작들은 탁월한 소재, 색채와 선, 그리고 구도학적으로 상당한 수준작을 많이 남겼다. 젊은 시기에는 큰 부호의 아들로서, 넓은 아뜨리에서 회화예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였던 시기였다. 그에 비하면 중·후반은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 차원에서 풍부하지 못하였던 시기라, 작품들은 초기작들보다 예술적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다 “50대 후반부터 앓아온 중풍으로 붓을 거의 놓았을 뿐만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상태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물관 서편의 반달마을에서 부인 이옥지씨와 함께 단칸 셋방 신세를 지고 있어 문화예술인들의 따뜻한 관심이 아쉬운 상태다’ 라는 1991년 1월 11일의 慶州新聞에 기록된 내용에서 근대화가의 슬픈 운명의 한사람으로서 기록돼 쓸쓸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젊은 시절 화가로서 의욕이 넘치던 김준식의 수많은 미공개 작품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 유학 시절과 귀국 후의 작품들은 김준식의 화업에 있어 황금 시기의 작품들로써,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한다. 현재, 세상에 알려진 그의 작품은 대부분 중기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가장 빛나는 시기에 남겼던 대화가의 역량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앞당겨지기를 바란다.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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