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극재(克哉) 정점식(鄭點植·1917~2009)은 아호에서 자신의 자전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극한으로 노력한다’는 뜻을 가진 극재는 화가, 교육자, 수필가, 평론가로서 광범위한 노력을 이룬 예술가였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일평생을 색상 이미지로 볼 때 정점식을 상징하는 색은 회색과 갈색이 섞여진 중간색 톤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상상해본다.

성주에서 출생하여 대구 남산동에서 선배 화가인 서동진, 김용조, 서진달, 이인성의 영향을 받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중국 하얼빈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였다. 쯔다 세이슈 일본인 교수와의 특별한 만남으로 많은 격려와 조언을 받았다. 당시에 하얼빈 풍광을 스케치한 소품이 현재 몇 점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다시 대구에 정착한 후, 선배 화가들 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2차 대전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온다)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 미학과 철학에 심취하며 자신을 이겨 나가고자 했다. 그 결과 폭 넓고 깊이 있는 사유체계의 조형언어를 시도 하였다. 초기 작업은 두 사람이 화폭에 등장한다. 남녀 같기도 하고 아이와 어머니 같기도 한 반추상과 추상 형상이 공존하는 50년대의 작업이었다. 경북 선산의 오상중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시작으로 대구 계성중고에 1962년까지 근무한다. 이 시기 대구미국문화원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1953년)이 열렸다. 이어서 대구미국문화원에서 대구미술가협회 창립전이 열렸고 직접 쓴 창립전 서문에는 “변동하는 사회나 이체(弛體)되어 가는 일군의 인간 군상을 앞에 두면서 고의로 이것을 회피하고 자신의 감동조차 느낄 수 없는 쇄말적인 묘사에 떨어지는 그러한 경향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며 자아 반성의 기회로서 이 전람회가 가지는 뜻으로 하고 싶었다” 고 밝히고 있다. 이때부터 벌써 대구·경북의 리더로써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1964년 대구 대명동 언덕 위에 계명기독대학 미술공예학과가 신설된다.

정점식作 실루엣(1957)

정점식은 커리큘럼을 짜고 학과를 운영하였다.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이 발휘되어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지금도 대명동 캠퍼스 정문에서 미술대학으로 오르는 왼쪽편에 자리한 바위에는 직접 쓴 문구가 있다. “이런 바위산을 깎아서 오늘을 마련했다”고 정점식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가 얼마나 학교를 아끼고 제자를 사랑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증표이다.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릴 때도 항상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오픈식에 나와 축사도 하고 실험정신을 강조하였다. 미술제 기간에 서울의 중진작가들이 대구에 오면 “대구에는 정점식이라는 해박한 작가가 있다”라고 회자 되었다. 지금은 한국의 대표작가로 일컫는 박서보, 하종현, 윤형근, 등이 이 기간에 대구에 왔다.

이러한 지역에서의 교육자이자 예술가로 빛을 내면서 4권의 수필집 <아트로포스의 가위><현실과 허상><선택의 지혜><화가의 수적>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누군가 이야기 한다. 그의 수필집은 시인이나 수필가를 능가한 문학적 소양이며 그가 말한 ‘극재’라는 자기의 혁신과 모색으로 일구어 놓은 결과였다. 말년에 그의 노력에 조금의 보상이라도 하듯 ‘2004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1, 2전시실에서 두 달간 개최되었다. 도록에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드물게 보이는 학구파로서 한국에서 모더니즘이 채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에 현대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앞선 예술관을 견지하시고…한국현대회화사에 한자리를 차지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존경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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