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오래전 유학을 가서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고민에 시달린 일이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있는데, 피부색이 검은 이들을 온 사람을 내가 막연히 차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얀 서양인을 보면 어느새 약간 주눅이 들고,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은 박사과정 선배인데도 어딘가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을 보며 절망했다. 당시에 일어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 철폐와 넬슨 만델라의 용기에 감동했지만, 나의 암묵적인 편견을 깨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나는 머리로만 인종차별을 극복했을 뿐, 내 몸과 마음은 여전히 차별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고민은 오래지 않아 해결되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유학 온 붙임성 좋은 신부님이 말이 걸어 와서 친해졌고, 그 이후 이집트, 가나에서 온 여러 친구가 생기자 나의 편견은 싹 사라졌다. 우정이 그들의 피부색이 막고 있던 모든 차별적 인상을 모두 없앤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피부와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 얻은 깨달음은 지금도 어느 정도 유용하다. 언론에 나오는 정치인이나 범죄자의 이야기에 화를 내다가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내 분노의 조금은 희석될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그가 탐욕과 거짓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실은 누군가의 자식, 부모, 친구이며, 부실할망정 인격과 인권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려 애쓴다.

편견과 혐오와 배제는 멀리서 누군가를 파악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특징으로 그 사람을 환원할 때 생겨난다.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이 생겨 서로가 사람임을 확인하기 전까지 누군가의 피부색, 장애, 가정형편, 정치적 입장, 질병 등은 좋든 나쁘든 모두 비합리적인 편견의 원인이 된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사고로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해도 대개 별 느낌이 없는데, 그중 한국 사람이 있다 하면 대개 촉각이 곤두선다.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묘하다. 이 경우엔 피해자가 생기지 않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누군가의 학력이나 살고 있는 동네로 첫 인상을 삼고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것은 피차 서글픈 일이다. 이렇게 가볍고 허망한, 그러나 해로운 편견은 애를 써서 극복해야 할, 차마 내색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다행히 이제는 진정되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시작된 중국 우한에 있던 우리 국민들을 데려와 격리 수용할 장소를 정하는 과정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중국인의 우리나라 입국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서슴없이 제기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심각한 전염병의 창궐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영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그중에 내 가족과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리 쉽게 할 말과 행동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지 바이러스가 묻어 있는 물건이 아니고, 그렇게 취급해야 한다면 예외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이다. 설사 남이 가진 어떤 특징이나 질병이 내게 부담스럽더라도, 애써 그 사람을 인격으로 존중하고 내가 피하고 싶은 부분만 따로 떼어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두 주가 지나 바이러스의 확산이 진정된 후에, 아산과 진천에서 격리되어야 했던 분들과 주민들, 우한의 시민들과 우리 국민이 어떤 식으로든 만나는 계기가 있으면 좋겠다. 잠재적 바이러스 보균자와 두려움에 찬 이기주의자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그때의 불안과 서운함, 서러움과 고마움을 나눈다면, 다시 돌아갈 일상이 좀 덜 각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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