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말실수가 잦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필부필부(匹夫匹婦) 차원에서는 말실수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부부싸움(연인 간의 사랑싸움 포함)의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가까운 이들에게 ‘미운 정’이 하나 더 추가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큰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말실수가 그야말로 대수로운(중요하게 여길 만한) 것이 됩니다. 경쟁자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되고 호기심 많은 대중들에게는 좋은 술 안줏감이 됩니다. 대표적인 게 대선후보들의 말실수입니다. 수십만 표에서 수백만 표까지 왔다 갔다 합니다(기억에 남는 것들로는 ‘노인론’, ‘아바타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말실수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말실수는 아니었지만 그런 어조를 시의적절하게 활용해서 자신을 향한 인신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일거에 전세까지 역전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조강지처론’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장인의 좌익활동 전력을 문제 삼는 상대의 흑색선전에 “제가 (여태 현모양처로 살아준) 아내를 버리면 대선 후보로 밀어주시겠습니까?”라고 되받아친 것입니다. 아마 그 이후로 ‘레드 콤플렉스 건드리기’가 선거판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질 나쁜 진짜 말실수 하나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말실수는 그렇게 논리를 떠나서 “무엇이 중하냐?”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힘을 가졌습니다.

말실수는 콤플렉스(감정복합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한 수단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단어 연상 검사를 통해서 콤플렉스의 존재와 활동영역, 그리고 그 영향력 등을 분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말실수들은 일종의 자발적인 단어 연상 검사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는 단어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호, 불호가 분명한 자신만의 ‘감정적 반응’들이 형성됩니다. 개중에는 즉각적인(신경질적인) 반응도 있고 정반대로 한 템포 늦게 나오는 반응도 있습니다. 주장이 강한 사람, 배운 사람, 교양을 중시하는 사람,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늘어진 반응’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방어기제나 합리화가 더 작동한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어쨌든 사람이라면 누구도 말실수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흔들리니까 청춘’인 것처럼 ‘말실수하니까 사람’입니다.

꿈에서도 말실수를 할까요? 어젯밤 꿈에 당일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했던 낯익은 공간이 등장했습니다. 직장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도시 순환도로가 있고 아래로 계곡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그 식당은 나오지 않았고요(무의식이 그렇게 의식의 감시를 피하는 모양입니다). 어릴 때 친구의 아버지가 그곳에서 세탁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친구 이름을 대고 아는 체를 했습니다(그런데 그 이름이 젊은 시절 만난 어느 출판사의 경영사장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전날 차를 세워둔 곳을 찾지 못해서 우왕좌왕했습니다(모종의 제 감정을 건드리는 단어가 출현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깨어나서 이 글을 씁니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말실수들을 점검해 봅니다(이런 글을 쓰다 보면 그런 ‘바이러스 검사’가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꿈에는 ‘말실수’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꿈의 어법은 현실과 전혀 다릅니다. 간혹 초인지가 개입해서(꿈꾼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저런 덧칠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꿈은 항상 현실보다 정직하고 생생합니다. 그래서 “꿈같은 일이다.”라는 말은 중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짜 현실이다’라는 뜻과 함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라는 뜻도 동시에 가집니다. 장자가 말한 ‘나비꿈’인 것입니다. 최근 개인 간 사적으로 주고받은 대화(말실수 포함)를 공개하는 일이 잦습니다. 심지어는 국가공권력을 행사하는 측에서조차 그런 ‘말실수 책임론’을 펼칩니다. 그건 ‘말실수 인간’에 대한 온당한 대접이 아닙니다. ‘말실수 꼬투리잡기’는 자중 되어야 됩니다. 꿈이 아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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