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나와 정점식 화백은 40여 년 나이 차이가 있다. 부모님 연령 세대이다. 나에게 극재 정점식 화백은 불가에서 말하는 ‘우연한 인연은 없다’는 말씀이 떠오른다. 정·점·식이라는 세 글자를 인식하게 된 것은 70년대 초부터였다. 계명대학 교수미전에서 추상화 작업을 보고 독특한 표현을 하시는 분으로 인식하였다. 그 후 대구시내 전시장 먼발치에서 가끔씩 만나 뵐 수 있었다. 1977년에 대구백화점 갤러리에서 회갑을 기념하여 계명대학 제자들과 함께한 <극재 장학기금 모금전>을 지역에서는 처음 볼 수 있었다. 당시에 이러한 개인전을 겸한 전람회는 처음이어서 많이 회자 되었다. 세월이 흘러 대명동 계명대 미술대학에 위치한 정점식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당신은 계시지 않아 작업하던 광경만 펼쳐져 있었다. 그 후 96년부터 대구시립미술관 건립 운동을 위하여 가끔 뵙기도 하고 차로 모시기도 하였다.

점잖게 한마디씩 툭 던지는 말씀에도 시대정신을 앞세우는 예술론을 피력했다. 칭찬에도 인색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나의 작업을 보시고 아주 좋다고 칭찬한 것이 기억에 새롭다.

평소에 미술에 관련하여 바우하우스와 같은 실용을 주장하였다. 일례로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 산업과 미술의 만남이 꼭 필요하다고 하였다. 특히 대구 경북은 산업디자인을 통하여 세계로 나가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관심인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학교 캠퍼스 중에 대명동 계명대와 성서 계명대를 꼽는 사람이 많다. 가보면 너무나 멋진 환경과 건축물들로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었다. 외국의 관광객들도 탄성을 울리기도 한다. 2001년에는 40여 점의 작품기증으로 계명대학교 도서관 내에 극재미술관이 개관되었다. 학교에서 그의 공적을 인정한 것이다. 구십 세 넘어서까지 활동하시던 극재 선생이 2009년 작고하시고 한동안 기억의 저편에 잊고 지냈다.

극재 정점식 탄생100주년 기념전 - 학강미술관(2017)

그러던 어느 날 시내 중고서점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다 한 가게의 주인이 어떤 시집에 쓰여진 간지를 찢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주인장 찢어서 버린 그 종이 좀 봅시다.”

‘극재 정점식 인형에게 청마 드림.’ 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멍하고 몇 초간 몸이 굳었다. 놀라움에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오늘부터 계속 올테니 앞산 밑 아파트에 사셨던 극재화백님 댁에서 가져온 관련 서적을 모두 찾아 나에게 양도하도록 부탁했다. 그래서 수백 권의 미술서적과 미술전문지들을 다리미로 다리기도 하고 한지를 덧붙여서 장정해 보관하였다. 그중에는 시중에 볼 수 없는 귀한 책들이 대다수였다. 광복 후 미국문화원에 드나들며 탐독한 <미술전문지>와 <김소월 영문초판본>, 1949년 뉴욕의 스트라빈 출판사의 <친필 번역서>등 중요한 자료들을 수장하였다.

그중 다다이스트로서 뒤샹에게 영향을 끼친 한스 리히터(1888~1976)가 직접 서명한 <다다이즘 예술과 반예술> 서적이 있어 중요한 자료로 보관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러한 귀한 자료들이 나에게 온 것인지 지금도 아카이브의 소명감을 가지게 된다.

2017년 6월 극재 탄생 100주년 기념 ‘위대한 삶과 오래된 공간’이라는 전시회가 학강미술관에서 열렸다. 오픈 날 심포지엄에 많은 미술인이 참석하여 극재의 삶과 예술작품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중 극재의 제자인 한 원로미술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은사였던 극재는 피카소 얘기를 자주 했다. 또한 무척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이다. 겸손하고 지적이며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추진력이 있고 내면이 깊은 예술가였다.”고 하였다. 극재는 자신의 수필집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미술은 취미가 아니라 취미의 유희보다 한층 심각하면서 헌신적인 작업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