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0년 나라가 일제에게 강점되자 경북유림들은 이듬해 설을 쇠고, 연이어 만주로 망명하였다. 울진 평해황씨 해월문중에서 50여 명, 안동 석주 이상룡을 중심으로 한 고성이씨 일문과 백하 김대락·일송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안동 의성김씨 천전파 문중에서 각각 150여 명 망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이희영을 중심으로 한 울진 평해 경주이씨, 영덕 축산의 무안박씨, 허혁을 중심으로 한 구미의 김해허씨, 상주 봉대 진주강씨, 영양 주실의 한양조씨 일문 등 적지 않은 유림들이 만주로 망명하였다. 아직까지 정확한 망명 인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대열에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과 며느리 이중숙, 이광민의 부인 김숙로, 김동삼의 부인 박순부와 제수 월성이씨, 왕산 허위의 부인 평산신씨와 며느리 박노숙·손기옥, 이원일의 아내 김경모와 딸 이해동, 추산 권기일의 아내 김성, 배재형의 부인 김씨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이름조차 추적하기 힘든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여성들은 망명길에 함께하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여성들의 대(對) 망명 인식을 밝히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자료를 남기지 않았던 여성들이 대부분이라 이를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다행히 김우락(金宇洛·1854∼1933)이 남긴 가사(歌辭)에서 그 생각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57세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했던 김우락은 망명 1세대 여성으로 만주망명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가 적지 않다.

지금까지 발굴된 김우락의 가사로는 ‘해도교거사’와 ‘간운’, 그리고 ‘조손별서’가 있다. 이 가운데 ‘해도교거사(海渡僑居辭)’에는 1911년 가을에 작성한 것으로 망명 초기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김우락은 이글에서 “자신이 비록 여자라도 나라 잃은 울분이 생기는데, 애국지사의 비통함은 당연지사이며, 그러니 망명은 말릴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가족들의 만주망명이 ‘국권 독립’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심지어 우리가 일찍 개화했더라면 ‘만주 땅이 우리 것이 되었을까’라는 반문을 하기도 했다. 또 자신이 좀 더 젊었더라면 독립에 힘을 보태었을 것이며, 아무리 여자라도 한번 쾌설(快雪)할 것이라는 포부를 담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김우락은 가족 구성원을 독려하고, 자제들에게는 광복 대업에 충실히 임하도록 권면하였다.

울진 평해의 권송대(權松臺·1889~1933)의 경우도 남편 황의영(黃義英)이 만주 망명 의사를 밝히자, 함께 논의하며 적극적으로 함께하였다. 물론 원하지 않았던 망명길에 함께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도 있었지만, 대부분 독립을 위한 ‘당연지리(當然之理)’, ‘대의(大義)’로 여기고 함께 하였다. 그러나 대의라 여기고 함께한 만주 망명길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1세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며 자신의 뜻을 다잡는 것이 큰 과제였고, 또 하나는 시시각각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생활 현장에서 가족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다. 함께 간 어린 자녀들을 민족 앞에 쓸 좋은 그릇으로 길러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이러한 수많은 과제 앞에서 여성들은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헤쳐나갔다. 경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에서 그 뜻을 꺾지 않고, 2~3세대를 이어 장기간 투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바탕에는 바로 여성들이 있었다. 우리가 이들을 찾아내어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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