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설(구정) 연휴에 자식들이 다녀가고, 벗을 만나고 이웃과의 인사 나눔으로 좀 분답은 시간을 보낸 뒤 일상으로 돌아와 조용히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 나이가 일흔다섯. 어느새 ‘노인’ 소리를 들을 나이가 돼 버렸다.

아흔세 살의 송해 오빠가 있긴 하지만. 노인이 어디 나쁜 말인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익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렸다.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로 그에게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은 오늘만은 꼭 큰 고기를 잡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바다에 나간다.

85일째, 드디어 큰 고기 청새치가 낚시에 걸린다. 청새치는 바다에서 뼈가 굵은 노인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고 노련하기까지 하다. 수심 180m의 심해에서 사는 놈이라 낚시를 물고도 좀체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노인과 청새치의 팽팽한 싸움, 팔의 힘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어 노인은 낚싯줄을 등에 건다. 조금도 힘이 약해지지 않는 청새치는 노인의 배를 끌고 자꾸 먼 바다로 나간다. 어느새 망망대해. 노인과 고기의 밀고 당기는 싸움. 먹을 것이라고는 달랑 물 한 병. 식량은 아무것도 없다. 날치 몇 마리를 잡아 생으로 먹으며 버틴다.

노인은 자신이 어부가 된 것을 순간 후회하기도 한다. 낚싯줄 하나로 연결된 둘의 팽팽한 대립, 예상치 못한 청새치의 반격으로 노인의 얼굴은 찢어져 피가 나고 낚싯줄을 당겨야 할 손도 심하게 상처를 입는다.

그만 포기하고 낚싯줄을 놓아버리면 좋으련만 노인은 결코 낚싯줄을 놓지 않는다. 꼬박 이틀 밤낮을 낚싯줄을 풀고 당기는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낸 뒤에야 청새치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의 승리다. 700kg이 넘어 보이는 큰 고기를 배의 옆면에 묶고 항구를 향하며 비로소 안도와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순조로운 항해는 불과 한 시간. “좋은 일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노인의 말처럼.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덤벼들기 시작한다. 노인과 상어의 싸움. 피는 피를 부르고 상어는 상어를 부른다. 계속되는 상어 떼의 공격에 청새치의 살점은 점점 뜯겨 나가고 볼품이 없어진다.

이때쯤 노인은 배에 매달린 청새치를 잘라 버려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상어와의 전쟁도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고집스럽게 청새치를 버리지 않고 달려드는 상어 떼와 싸우는 길을 택한다.

왜 싸우는 방법을 선택했을까? 건질 고기도 없는데.

이때쯤이면 노인의 싸움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잡은 고기의 살점은 다 뜯겨 나가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없다. 그러나 노인은 배에 묶은 청새치의 줄을 풀지 않는다. 결국 상처뿐인 몸을 이끌고 항구에 닿았을 때 거대한 청새치는 앙상한 뼈만 남아 있다.

노인의 싸움은 패배한 것일까? 1954년 헤밍웨이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될 때 스웨덴 한림원은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다룬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싸움은 패배가 아닌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

막강한 권력과 싸우는 이들도 있다.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는 이들도 있다.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보수의 힘으로는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없다. 하나의 낚싯줄에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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