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 직전 어느 날이었다.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이 열리는 대강당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람들이 탑승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 사람들이 타려고 하자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안내원이 사람들을 제지하면서 총리께서 오시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온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사람들을 타지 못하게 한 이유를 물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기꺼이 총리에게 탑승을 양보하겠다고 했다. “내가 총리가 된 것은 인민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인데 어찌 내가 먼저 지나가겠다고 다른 사람을 비키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우언라이의 말이 떨어지자 곁에 있던 저우언라이 부인 덩잉차오(鄧潁超)가 말했다. “이 분의 정식 이름은 총리가 아니라 저우언라이입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차이점은 공산당이 인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일하는데 있습니다. 이 분이 어딜 가시든 이 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덩잉차오의 이 같은 자상함 때문에 중국 인민으로부터 ‘큰 누이 덩잉차오’라 불리면서 신뢰와 사랑, 존경을 받았다.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의 부인이며 혁명가였던 덩잉차오는 평생을 통일전선정책 실천과 중국 여성운동 지도에 헌신했다. 민첩한 상황판단과 세심한 친화력으로 당 안팎을 넘나들며 광범위한 인사들의 통합에 큰 몫을 했다. 남편 저우언라이와 함께 자신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인들에겐 누구나 다가가기 쉬운 친절한 누이로 각인됐다.

당의 인사들을 대할 때는 가식 없이 진심으로 대해 많은 이들이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외빈을 접대할 때도 친절하면서 세심해 어떤 말을 해야 하는 지 신중하게 판단해 대화를 나눴다. 덩잉차오의 사려 깊은 태도에 외국 국가 원수를 포함, 각국 외빈들은 그녀에게 존경을 표했다. “어떠한 추도 행사도 하지 말 것, 시신을 해부한 뒤 화장할 것, 살고 있던 집과 소유하고 있던 물품은 모두 당과 인민에 기증할 것” 덩잉차오의 유서 내용이다.

“검찰총장이 내 명을 거역했다”면서 위세를 부리고 공소장 공개 거부로 국민의 알 권리를 깔아뭉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덩잉차오의 겸손부터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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