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집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하루는 제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예술이 되고 안 되고는 누가 결정해요?”
그 질문에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걸 아는 놈들이 결정하지.”
아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제가 답했습니다.
“당근, 예술가들이지.”
아들이 또 물었습니다.
“누가 그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인정하는데요?”
“그거야 물론 다른 사람들이지.”
아들은 납득이 잘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기는 예술가라고 우기지만 남들이 아니라고 하면요?”
“그러면 아닌 거지.”

그러자, 아들이 픽하며 콧방귀를 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왠지 그 표정 속에 ‘별 내용도 없이 공연히 예술가연(然)하는’ 아버지에 대한 조롱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작심하고, 목소리를 좀 딱딱하게 해서,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본디 모르는 놈들은 끝까지 모른다. 이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뉜다. 아는 놈과 모르는 놈. 그게 예술가들이 이 세상을 나누는 유일한 척도다.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르는 놈은 끝까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이미 오래전에 강조한 바가 있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 것은 ‘아는 놈이 되어야 한다’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경지(境地)’라는 말이 있다.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 그 말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물이나 현상이 반드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경지에 속하는 것이다. 경지에 든 놈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닌 것이다. 이상!”

아버지의 말투에서 무언가 침범할 수 없는 결연함이 느껴졌는지 아들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행여 자기가 모르는 놈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품은 채(저의 추측입니다) 저의 시선을 외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습니다.

이십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아들도 성인이 되어 때로 늙은 아버지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다 그런 거잖아요?”라는 말도 가끔씩 합니다. 인생에는 되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예술가의 경지도, 아버지의 경지도 그 경지에 들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자기가 모른다고, 세상에 있는 것이 없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예술을 모른다고, 아버지를 모른다고, 예술이 없어지고 아버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도 아는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공유적 인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애매하고 모호하게 공유되는 것일지라도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여기면 규범이 되고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人間·관계적 존재)’인 것입니다. 예술도 그러한 공유적 인식의 바탕 위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은 그 ‘공유적 인식’에 맹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아방가르드는 예술가의 운명입니다. 나이 드니 인생이 곧 예술이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평생 공유적 인식 위에서 버텨왔지만 때로는 아방가르드를 자처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예술이 되고 안 되고는 물론 다른 ‘인생 예술가’들이 결정할 일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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