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규교대 교수
양선규 대규교대 교수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안다’는 것도 그렇지만 ‘본다’는 것은 참 많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눈으로 무엇을 본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보는’ 주체인 우리의 시각은 생각보다 허술해서 착각과 오인을 밥 먹듯이 합니다. 대표적인 게 만화나 영화 같은 시각(시간) 예술입니다. “영화는 알겠는데 만화도 그렇다고?”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화 영화(애니메이션)가 아니라 종이책 만화에서도 착시(錯視) 현상은 여전합니다. 물리적 차원보다 심리적 차원이 더 많이 작용하는 게 다를 뿐입니다. 만화를 몰입해서 보다 보면 무심결에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화가 착시현상을 이용해 그림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면 만화는 하나하나 분절된 그림을 심리적 동화작용이 나서서 연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특히 말풍선에 담긴 대사가 그림과 그림을 연결해 주는 주요한 계기가 됩니다. 의미로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이 공간적 분할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혹시 만화를 읽을 기회가 있으시면 제 말을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또 “아는 만큼 쓴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라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일단 글자를 알아야 하고, 문법(맞춤법)도 알아야 합니다. 지식(견문)도 없는 것보다는 좀 있는 게 아무래도 낫겠지요. 그러나 “나는 아는 게 없어서 글을 못 쓴다.”, “나는 생각하는 힘이 부족해서 글을 못 쓴다.”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구요? 한 번 뒤집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스로 아는 게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인데 더 알 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스스로 생각이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아는 사람만큼 생각이 깊은 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는 것이 없고 생각이 부족해서 글을 못 쓴다는 말은 전혀 이치에 닿는 말이 아닙니다. 아닌 말로, 자기가 모르는 것만 빠트리지 않고 하나하나 열거해도 읽은 만한 글이 되고 자기 생각의 부족한 면만 차분하게 써 나가도 좋은 글이 될 겁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인지)의 영역에 속합니다. 또 “내가 아는 것이 부족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특정한 부분, 초인지 영역에 속합니다. 그리고 글이라는 것은 그 안의 글자와 구절 등이 한데 섞여서 자기들끼리 무언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던 것들을) 만들어내는 자율성이 보장된 공간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다 보면 항상 무의식(의식 밖의 영역)의 출현을 목도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글이 글을 부르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전문적으로 보는 이들이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항상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한다.”라는 말입니다. 때론 등장인물이 말하는 것을 관객들이 속속들이 다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 설명을 해주어야 알 때도 있고요. 그러나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작품에는 영원한 비밀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예술인 것이고요(아니면 주문이겠죠?). 등장인물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한다는 것은 그들이 해석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씁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글쓰기를 머릿속의 글자덩이를 밖으로 그냥 옮겨 적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쓰면서 생각하는 게 글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손으로(머리가 아니라) 생각하는 자다.”라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공부가 다 그렇겠지만 글쓰기 공부에서도 ‘글쓰기’가 가장 중요한 공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그 일부만 진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평생을 모르고 삽니다. 왜 태어나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사사건건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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